캔버스 넘어 공간에 새긴 ‘꿈’
캔버스 넘어 공간에 새긴 ‘꿈’
  • 손보미 ProjectAA* Asian Arts 대표
  • 호수 70
  • 승인 2013.12.04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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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의 Art & Dream

▲ 곽선경 작가 작품.
“글쎄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관심과 그것에 대한 자신만의 리얼리제이션(Reali zation), 깨달음이나 자각, 내가 상상하는 세계를 실현하는 것, 다른 사람에겐 생소한 세계를 제가 스스로 고민하고 이를 제시하는 것, 정답은 어디에도 없죠. 정답을 제시하려는 건 아니에요. 다만, 관객들이 생각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환기시키고 새로움을 선사해서 또 다른 세계로 다가설 수 있게 제가 상상의 범위를 넓혀준다면…. 그것이 아트(Art)가 아닐까요? 이것이 아티스트로서의 역할이라고도 생각하고요”

대뜸 ‘아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필자에게 곽선경 작가는 지난 20여년간의 뉴욕생활을 회고하며 운을 뗐다.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뉴욕 대학원을 다니면서, 이곳에서 작업을 계속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죠. 뉴욕은 정말 자유로운 곳이거든요. 물론 처음엔 미숙한 영어, 살인적인 물가, 시민권이나 영주권 등의 문제로 말도 못하게 고생을 하고, 9ㆍ11 테러 사건 때는 저 멀리 월스트리트에서 시체 냄새가 날아와 공포에 떨기도 했지만, 그냥 좋아서 최선을 다했어요.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보이지 않는 틀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그 어떤 틀. 뉴욕은 그런 게 없어서 좋아요. 정말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죠. 저에게 행복이란 평생 자유롭기 위해 노력하는 거예요. 예술을 보면서 어떤 이는 이런 저런 이유로 좋아한다고 논리적인 이유를 대기도 하겠지만, 그냥 좋은 것, 사랑에 빠지는 것 같은 이유로 그냥 아주 좋은 거 있잖아요? 좋은데 이유가 많이 필요한가요? 그냥 좋은 거, 생각만 해도 정말 정말 좋은 거. 행복도 마찬가진 것 같아요. 그냥 좋은 것, 자신이 매우 매우 좋아하는 것, 그것을 하는 것이 행복한 거 아닐까요?”

▲ 곽선경 작가 작품.
무대 위의 현대무용수 같은 세련됨이 몸에 배어 있는 곽선경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공간 드로잉(3D Space Drwaing)라고 불렀다. 이는 공간에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 안에서 사람과 에너지의 흐름을 그리는 걸 말한다. 그림과 관객, 재료와 작품, 작가의 창작과 관객의 관람 사이의 거리가 사라진 예술 세계. 누구도 표현하지 않은 단어로 자신의 영역을 새롭게 정의하면서 작업을 하고 싶었다는 곽 작가.
그녀가 뉴욕에서 작업을 시작한 것도, 캔버스나 물감 혹은 붓과 결별을 선언한 것도 모두 ‘자유로움’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기존의 틀을 넘어서는 예술가로서의 해방감을 가슴 가득 만끽하기 위해서. 곽선경 작가가 활용하는 재료는 주로 마스킹테이프(페인트가 쓸데없이 다른 곳에 칠해지지 않도록 그 가장자리에 붙이는 검은색 보호 테이프)다. 마스킹테이프를 마치 손에서 나온 검정 잉크처럼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건물의 하얀 벽에서부터 창문ㆍ계단ㆍ난간ㆍ소화전 위 등 이곳저곳 가릴 것 없이 테이프를 찢어 붙인다.

그녀에게 모든 장소는 잠재적인 캔버스가 되고, 손끝은 붓이, 붙임성이 강한 마스킹테이프는 물감이 돼 그녀의 상상은 공간에 현실화된다. 무용수가 퍼포먼스를 하듯이 공간을 리드미컬하면서도 입체적으로 드로잉하면, 들쭉날쭉하면서도 정교한 검은 선들이 때로 파도나 바람, 물줄기가 되기도 하고, 나이테나 뿌리 혹은 잔잔한 호수의 파문이 되기도 한다.

“놀라운 즉흥성을 가지고 가벼운 종이
위에서 더 자유롭게 입체 공간을 다룰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다. 선들의 시각적 효과를 통해 입체공간의 다양한 면을 침범하고
반영하며 공간을 새롭게 재창조한다.”
- 이탈리아 평론가 마리우치아 카사디오(Mariuccia Casadio), 보그(Vogue)지 이탈리아 판 -

뉴욕에 잠깐 있는 동안, 필자는 그녀와의 대화가 정말 좋아서 세번이나 그녀를 찾았다. 작가에게 직접 듣기도 하고, 필자가 자료를 조사해보기도 하면서 살펴본 그녀의 지난 행보와 앞으로의 계획은 놀랍기만 했다.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한국작가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고, 구겐하임 미술관에선 ‘당신이 없어도 난 당신과 함께 머물 것이에요(I Will Stay With You Even If You Are Not Here)’를 주제로 쿠바의 안무가 주디스 산체스 루이즈(Judith Sanchez Ruiz)와 함께 드로잉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춤을 추는 댄서들, 드로잉 위에 또르르 흐르는 피아노 소리와 댄서들의 살아 있는 몸짓이 ‘공간 드로잉’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시각예술, 무용, 음악이 장르와 공간의 벽을 허물고 한 예술로 섞이는 퍼포먼스로 극찬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베를린에서는 세계문화의 집 그룹전 ‘Re-Imaging Asia’, 마드리드 아르코 특별 그룹전을 펼치기도 했다. 또 국내에서는 광주 비엔날레, 삼성미술관 리움 등에 전시를 하기도 하면서,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렇게 자리 잡기까지 상당히 힘들었죠. 물론 작업이 즐겁고 행복했지만, 그 외에 말 못할 고생들이 많았어요. 처음 뉴욕에 왔을 때였던가. 1993년부터 몇 년간은 그림일기 같은 것을 그렸어요. 뉴욕에 와서 새로운 문화적 생소함이나, 어려움, 여기서 겪는 삶의 희로애락 경험들이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이어서, 남들은 글로 썼을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그림이 좋아 하루에 5장이고, 10장씩이고 무작정 그렸어요. 그래서인지 지금 다시 예전의 그림만 봐도,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마음가짐이었는지 다 기억이 나요. 추억이 있는 사진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면 그 장면의 잔상이 떠오르는 것처럼요.”

‘작가님의 꿈은 벌써 이뤄진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꿈, 글쎄요. 제 머릿속에 펼쳐지는 ‘상상’의 아이디어. 다시 말해 보이지 않고, 측정(Measure) 할 수 없는 것들을 아트로 만들어 사람들과 교감하고 공유하는 것이 제가 해왔던 것이고 앞으로의 꿈이에요. 제겐 성공이 전부가 아니에요. 만약 소모적인 가치라든지 모두가 열망하는 ‘부’나 ‘의식주’만이 필요한 조건이라면 세상에 왜 그렇게 많은 아티스트들이 가난해도 작업을 하는 걸까요? 나만이 아니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 소통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 소모적 가치가 아닌 보이지 않는 것에도 그 가치가 있다는 게 뉴욕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배운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작업을 열심히 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프랑스의 빛나는 지성인이자 노벨문학상
수상가인 아나톨 프랑스는 한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안다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상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To know is nothing at all.
To imagine is everything)”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1844-1924)

‘상상’은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곽선경 작가와 아나톨 프랑스의 말을 들어보니 상상이란 머리에 조금의 ‘공간’을 내어주는 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맑은 공기로 숨을 쉬면 온 몸이 상쾌해지듯이, 생각에도 상큼한 바람이 들 구멍 하나, 작은 공간 하나 슬며시 만들어 두는 건 어떨까.
글ㆍ사진=손보미 ProjectAA* Asian Arts 대표 katie.son@theprojecta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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