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만 한양대 교수의 생각체조
남다른 족적을 남기려거든 두발로 걸어가는 역사를 써라. 스마트폰을 쥐고 하루 종일 검색만 하고 사색을 하지 않으니 사유의 힘은 갈수록 떨어지고 남의 정보에 의존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철학의 첫 스승은 우리의 발이다.” 철학자 루소의 말이다. 생각의 ‘발로發露’는 ‘발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걷기의 중요성을 설파한 최초의 철학자,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틈만 나면 제자들과 함께 걸으면서 토론하는 방식으로 철학을 가르쳤다.
걸으면서 발을 자극하면 뇌신경을 자극해 색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고와 철학의 깊이가 더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파가 ‘페리파토스(산책길)’라고 불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책을 하면서 읽었던 책을 반추해보고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소화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제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한낱 공염불에 그칠 수 있다.

남다른 족적을 남기려거든 두발로 걸어가는 역사를 다시 써라. 이력서履歷書도 내 두 발履이 걸어온 역사歷의 기록書이 아닌가. 스마트폰을 쥐고 하루 종일 검색만 하고 산책하면서 사색을 하지 않으니 사유의 힘은 갈수록 떨어지고 남의 정보에 의존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기술문명이 발전할수록 내 몸을 직접 움직여 땀을 흘리는 노동을 하지 않는다. 신체 기능의 많은 부분을 기계에 의존하면서 인간의 신체 근육은 물론 사고ㆍ감성근육도 퇴화하기 시작한다.
생각의 한계는 체험의 한계와 맞닿아 있다. 체험은 내 신체가 자연, 사물, 그리고 사람과 접촉한 기억을 말한다. 시멘트로 지어진 집과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가 많아질수록 신체가 자연과 직접 접촉해 받는 기운이 없어지고, 인간은 이때부터 이전에 없던 질병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밖에서 많이 놀아본 아이일수록 상상력과 창의력이 뛰어나다. 우리말로 손재주꾼으로 번역되는 ‘브리콜레르’는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에 해당된다. 브리콜레르는 주변에 있는 재료와 도구를 활용해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척척 해결하고 위기상황을 식은 죽 먹듯이 탈출하는 사람이다.
브리콜레르는 도구가 부족하거나 환경이 열악함을 탓하지 않는다. 현재 사용할 수 있는 도구를 활용해 재미있게 논다. 그 놀이를 거치면서 이전과 다른 창의성이 싹트고 틀에 박힌 일상을 탈출한다. 그 결과 삶은 숙제가 아니라 축제가 된다.
브리콜레르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꾸고 낯선 것을 익숙하게 보여주는 예술가다. 놀이가 바로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꾸는 모든 행동을 지칭한다면 브리콜레르는 주변에 널려있는 하찮은 것들을 주서모아 재미있게 노는 아이들이라고 볼 수 있다. 아이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장난감이다.
창작은 충분하지 못한 재료와 시간, 좋지 못한 환경과 여건을 무릅쓰고 일어난다. 놀아야 진짜 놀지 않는다. 신나게 놀아야 나중에 눈물 나게 놀지 않는다. 노는 사람이 삶을 바꾸고 숙제를 축제로 바꾼다. 새로운 것의 창조는 지성이 아니라 놀이 충동에서 생겨난다.
“창조하는 마음은 좋아하는 대상과 함께 논다.” 정신분석학자 칼 융의 말이다. 이 시대 최고의 성현은 공자와 맹자도 있지만 ‘놀자’와 ‘웃자’도 있다. 어린아이처럼 놀면서 웃는 천진난만天眞爛漫함과 순진무구純眞無垢 함이 세상을 바꾼다.
유영만 한양대 교수 010000@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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