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The Scoop] 명나라 조정은 이종성이 달아났다는 보고를 듣고 부사 양방형을 정사로 심유경을 부사로 승직시켰다. 심유경이 조선조정에 대해 일본에 통호사를 보낼 것을 청했다. 조선에서는 화의를 원치 않아 거절했다. 그러나 대국의 사신이 조르는 통에 마침내 부득이하게 사신을 보내게 됐다.

권율은 사천에까지 와서 제장들만 한산도로 들여보냈다. 김덕령은 광주光州 유생으로 용력이 몹시 뛰어나 세자가 남방을 순행할 때에 불러 시험해 본즉 김덕령이 허리 좌우에 백근 쌍철추를 차고 말을 달림에 나는 듯이 왕래하였다. 세자는 김덕령에게 충용익호장忠勇翼虎將이라는 호를 하사하고 형조좌랑의 벼슬을 주었다.
갑오1594년 9월 27일에 첨지 곽재우, 좌랑 김덕령 등이 각기 수하 병사들을 거느리고 한산도에 들어오고 그 당일 석양에 전라병사 선거이가 들어왔다. 선거이는 순신과 동석하고 곽재우와 김덕령은 각기 친한 장수에게 명하여 대접하게 하였다. 다음날에 병선 50척으로 곽재우와 김덕령의 군사를 실고 장문포를 향하고 순신은 대군을 통솔하고 뒤를 이어 수륙병진하였다. 곽재우와 김덕령은 배에서 내려 산으로 오르고 순신은 포구 안으로 들어가 대번에 적선 2척을 깨뜨려 불살랐다. 적군은 순신의 병선을 무서워하여 창황망조하여 두 갈래로 달아나 깊은 소굴 속으로 들어갔다.
곽재우와 김덕령은 기세를 얻어 말을 타고 창을 들고 병사들을 끌고 사납게 돌진하였다. 적병은 견고한 성채에 의지하여 몸을 숨기고 조총만 비 오듯 쏘아대면서 패목牌木을 내세운다. 그 패목에는 “日本與大明方講和不可相戰(일본과 명나라가 강화하니 서로 싸움이 불가하다)”이라는 글을 썼다. 조총의 탄환이 비 오듯 퍼붓는 바람에 김덕령 같은 용장도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하지를 못하고 곽재우와 함께 그만 뒤로 물러나 날이 저물어 회군하여 한산도로 돌아왔다.
선거이 곽재우 김덕령 등 육로 제장은 순신의 진중에서 10일간이나 머물며 병법과 무예를 논하고 옛이야기를 나누다가 10월 7일에야 출행하였다. 순신은 시를 지어 석별의 정을 표하였다. 첨지 곽재우와 좌랑 김덕령 등에게도 시를 주어 뜻을 나타냈다.1)
이때 조정에서 좌상 윤두수는 탐욕스럽기 그지없고 우상 유홍은 큰소리치다가 나라를 다치게 한다고 대론2)이 일어났다. 영의정 유성룡만은 그대로 있었으나 좌•우의정은 다 개체되어 김응남으로 좌의정, 정탁으로 우의정을 삼았다. 평안도 순찰사 이원익은 군사 8000명을 모집하였다는 공으로 정1품 숭록대부崇祿大夫를 올려주었다.
풍신수길을 봉왕封王하기로 명나라에서 나온 책봉정사 후작 이종성의 접반사로는 이조판서 이항복을, 책봉부사 양방형의 접반사로는 호조판서 김수를, 심유경의 접반사로는 설유說諭 황신黃愼을 내었다. 김수는 잘 달아나던 사람이요 또 이순신과 부산의 적을 수륙협공하자고 약속해 놓고 무서워서 이행을 못한 신의가 없는 사람이었다. 황신은 쓸 만한 사람이라 하여 미관말직에 있는 것을 영상 유성룡이 천거한 사람이었다.

황신은 심유경을 따라 웅천의 소서행장의 진으로 들어갔다. 행장은 심유경을 윗자리에 앉게 하고 황신에게는 좌석도 주지 아니하였다. 황신이 노하여 행장을 보고 그 무례함을 책하였다. 행장이 사과하되 천조의 관리와 동석함이 어떨지 몰라 그랬다고 변명하였다. 심유경은 행장에게 일본군이 전부 철수하기 전에는 책봉사가 부산에 올 수 없다고 하였다. 행장은 전군의 철수는 풍신수길의 명령이 아니고는 될 수 없다 하여 심유경을 진중에 머무르게 하고 자기만 일본에 가서 수길의 의견을 알아가지고 온다 하여 배로 부산에 있는 부전수가秀家에게 다녀서 타협한 뒤에 비전의 명호옥을 향하여 갔다.
주전론-주화론 공방 이어져
이 모양으로 명나라와 일본이 지루한 세월에 외교적 절충으로 하여 계사 갑오 을미 병신 4년이 되는 동안에 교섭하여 오는데 조선에서는 주전 주화 양파가 동서당쟁과 병행하여 싸우게 되었다. 주화론자로는 전라감사 이정암이었다. 연안부 싸움에 흑전장정의 침략을 물리친 전승한 공이 있는 공신이었다. 그의 논리는 지금 국세가 피폐하고 인민이 이산하였으니 잠시라도 화의를 들어주어 월왕 구천이 와신상담하던 것을 본받아 실력을 양성한 뒤에 싸워보자는 것이었다. 이정암의 강화하자는 의견에 조정의 반대가 벌떼같이 일어나 대간 제신들은 이정암을 베어 죽이더라도 죄가 남을 것이라고 극언하였다. 갑오1594년 5월의 일이었다.
5월 26일에 영의정 유성룡이 선조의 부름을 받아 입궐할 때에 좌찬성 성혼을 대동하였다. 본래로 주전론자이던 유성룡이 명나라 장수들을 믿을 수 없음과 인민이 기근에 견디지 못하여 서로 잡아먹을 정도로 괴로운 지경이어서 하루를 지탱하기 어려우니 명나라로 하여금 외교정책으로 미봉이라도 하여 적의 형세를 늦추고 안으로 국방을 힘써서 서서히 살 길을 도모하자는 의견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선조는 성혼에게 주전 주화의 이해득실을 물었다. 성혼은 말하되 “지금 국세가 심히 위태하오니 잠시 싸움을 쉬이고 자강지책을 강구 도모함이 옳은 듯합니다. 우리나라가 이미 능히 싸우지 못하고 또 능히 지키지도 못하고 도리어 명나라의 강화책을 반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실책인가 합니다” 하였다.

선조는 적이 종묘에 불 지르고 왕릉을 범굴한 일을 생각하고 “일본은 원수인데 어찌 원수와 화친을 말하리오! 이제 화친을 말하는 자는 죽임이 마땅하다!” 하고 어성을 높였다. 유성룡은 감히 말을 내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이로부터 삼사의 제신이 다투어 주화론을 배척하였다. 유영경이 그 두목이었다. 선조는 오언시를 지어 조정에 방을 붙이게 하였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이렇게 조선 조정에서는 주전 주화 양파가 서로 싸우고 있는 동안에 그런 것은 아는 체할 것도 없이 명나라와 일본의 사이에는 화의가 점차로 진행이 되어서 도사都司 담종인은 일본을 다녀왔다. 이때는 명과 일본 두 나라가 휴전중이라 하여 심유경 등이 웅천의 소서행장의 진중에서 승 현소를 데리고 시를 지어 주고받았는데 그중 명의 장수 유대무兪大武의 시는 다음과 같다.
이때 한산도의 이순신도 명국 사신의 금토문으로 인하여 적극적 전쟁행동은 못하게 되었다. 공무를 마친 뒤에는 일기가 청화하면 제장을 불러 활쏘기 하고 밤이 되면 병법과 군기를 강구하고, 달밤이 되면 수루 위에서 배회하여 우국의 정서를 금치 못하여 시를 읊으며 밤을 보냈으며, 비오는 날이면 이억기 이순신李純信 권준 이운룡 등 가까운 장수들과 더불어 바둑으로써 바다에 매인 신세를 서로 위로하였다.
바둑은 수담手談 또는 좌은坐隱이라 하는 한가로운 유희인데 중국의 요순시대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니 특히 단주丹朱 태자가 애호하였으며 역대로 명인국수가 계속하여 오는데 조선에 들어오기는 신라 효성왕孝成王 때에 당나라 사신이 와서 가르친 것이었다. 생사와 변화의 묘리가 무궁하여 족히 장수의 용병법과 흡사하다. 이공도 시름을 잊는 하나의 도구로 이억기공 등과 같이 둘뿐이었다.
명나라에서 풍신수길을 봉왕한다는 책봉 정사 이종성과 부사 양방형의 무리 일행이 남원에서 개구리를 잡아먹고 여러 달 묵다가 을미1595년 10월 모일에 부산으로 내려가 우희다수가4)의 진중에 들어가서 일본의 강화파인 소서행장을 불러서 조선 땅에 있는 일본군을 철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행장의 답은 명호옥 본영의 처분이 있어야 될 일이니 내가 가보아야 한다 하고 이종성의 일행을 부산으로 옮아 있게 하고 명나라에서 먼저 나온 철병사撤兵使 진운붕陳雲鵬이란 작자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수길의 의향을 들어보고 또 번왕책봉을 받을 의례법칙을 연습도 해야 할 것이라 하여 바다 건너 들어갔다.
풍신수길 일본국왕 되다

심유경은 일본 땅에 들어가서는 자기가 책봉사절이나 되는 듯이 북경에서 비밀히 가져온 중국의 문관 예복을 내어 입고 수길의 부하중에 덕천가강 모리휘원 등 각 제후를 찾아보고 낮에 나온 도깨비 모양으로 교제를 훌륭하게 하는데, 태합 풍신수길에게는 망룡포5)와 옥대와 익선관과 명나라 지도와 무경칠서를 자기가 개인의 명의로 보내어 그 환심을 사고 또 석성에게서 받은 보물과 금은으로 수길 휘하의 요인들에게 뇌물을 보내어 책봉 정ㆍ부사보다도 자기가 더 중요한 중심적 인물인 것을 알리도록 애를 썼다.
심유경은 일본에 건너가서 이렇게 수길 이하 요인들의 환심을 사며 일본 미녀를 시첩을 두어 향락생활로 본래 부랑자의 근성을 발휘하고 있는 동안에 부산에 있는 책봉 정사 이종성에게는 겁나는 사건이 생겼다. 그것은 책봉 준비를 하러 간다던 심유경과 소서행장에게서는 몇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을뿐더러 자기만 부산에 내려오면 철병한다던 일본군대는 조금도 물러갈 동정을 보이지 아니하던 차에 일본에 가 있던 자기와 친분 있는 사람의 서간이 왔다. 만일에 이종성이 일본에 들어오기만 하면 반드시 사신으로서의 임무를 욕되게 할 것이라는 내용의 비밀 서간이 온 것이다.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은 본래 중국 복건福建 출신으로 왜구에게 포로가 되어 오래 일본에 있다가 도망해 나온다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심유경이 이종성을 미워하여 그를 일본에 건너오지 못하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이종성은 명나라 개국공신 이문충李文忠의 자손으로 임회후라는 후작을 대대로 세습하여 문벌이 높기 때문에 심유경을 일개 부랑자로 대접하여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꾸짖기를 예사로 하는 까닭에 심유경은 원망을 갚으려 함이었다.

그 이튿날 아침에 책봉정사가 달아난 것이 발각되자 일본 사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그들은 소서행장이 일본을 다녀와서 책봉정부사를 데리고 가는 날이면 자기네들도 조선 땅에서 전쟁의 노고를 면하고 하루바삐 철병이 되어 그리운 고국의 부모처자를 만나리라 하고 고대하다가 이제 책봉정사가 도망을 하고 보니 싸움이 끝날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라 하여 낙심한 까닭이었다.
부사 양방형은 늦잠을 자다가 정사가 도망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곧 이종성의 관사에 가서 방을 수색하여 본즉 정사의 인장이 남아 있고 서류도 있었다. 그리고 남아 있는 명나라 수행원과 군사를 불러놓고 도망한 이종성이 대명의 위신을 더럽히는 놈이라고 욕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일본 군사들은 진정이 되었다.
소서행장은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종성이 달아난 보고를 듣고 부사 양방형을 정사로, 심유경을 부사로 승직시켰다. 그때 심유경이 조선조정에 대하여 일본에 통호사通好使를 보낼 것을 청하였다. 조선조정에서는 화의를 원치 아니하므로 거절하였지만 대국의 사신이 자꾸 조르는 통에 마침내는 부득이하여 사신을 보내게 되어 심유경의 접반사인 황신으로 정사를, 대구부사 박홍장朴弘長으로 부사를 시켜서 명나라 책봉사절과 동행하게 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주석
1) 난중일기 중에 갑오년(1594) 11월 28일자에 나오는데, 이은상씨가 번역하여 「무제육운」無題六韻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 따라 세 편으로 가르고 해석도 그대로 인용하였다.
2) 대론臺論 : 사헌부, 사간원에서 하는 탄핵彈劾을 이르던 말.
3) 대황大荒 : 중국을 기준으로 아주 먼 지역을 말한다. 「산해경」山海經의 목차에 ‘산, 해외, 해내, 대황’ 등의 구분이 있다.
4)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 : 부전수가(浮田秀家 우키다 히데이에). 조선에선 평수가平秀家.
5) 망룡포龍袍 : 곤룡포袞龍袍.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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