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 마을공동체의 의미 있는 반란
“이화여대 앞에서 장사할 수 있으면 전국 어딜 가도 망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몇년 전만 해도 서울 상인들 사이에서 이 말은 진리였다. 신촌의 상가 임대료가 워낙 비쌌기 때문이다.
서울 5대 상권으로 불리는 명동•강남•종로•신촌(이대)•홍대의 임대료는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높은 임대료를 버텨내고 수익을 거두는 장사라면 전국 어디서라도 성공한다는 거였다. 덕분에 상가건물 주인들은 편안했다. 임대료는 오르면 올랐지 내려갈 줄 몰랐기 때문이다. 건물은 ‘황금알 낳는 거위’였다.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문을 닫는 가게가 속출하고 있다. 그 결과 공실률이 높아지고 상권은 활력을 잃고 있다. 빈 가게가 쉽게 채워질 턱도 없다. 요즘 같은 침체기에 가게를 새로 내겠다는 ‘간 큰 자영업자’가 많지 않아서다.
그렇다고 건물주가 임대료를 낮추는 것도 아니다. 임대료를 굳이 낮추지 않더라도 먹고 살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건물주의 욕심은 ‘악순환’의 고리다. 높은 임대료 때문에 가게를 내겠다고 찾아오는 상인이 줄어들 수밖에 없어서다.
하지만 다른 길을 걷는 건물주들도 있다. 임차인과 공존하는 상권을 만들겠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임대료를 기존의 절반 이하로 낮췄다. 6~7층짜리 건물의 1~3층은 상가로 분양하고, 3~5층은 젊은이의 주거공간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계획도 선보였다. 수익만 쫓는다면 개미방 같은 고시텔을 지으면 그만이지만 그러지 않았다. 되레 젊은이들이 머물기에 불편함이 없는 좋은 주거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건물주(임대인)와 임차인이 한데 어우러져 웃고 떠들 수 있는 집, 한발 더 나아가 그런 마을을 만들기 위해서다. 이참에 상권의 DNA도 바꿀 참이다. 이대 앞에 즐비한 의류매장 대신 먹을거리 중심의 상권으로 말이다. 이 역시 주거 목적으로 입주할 젊은 임차인들을 위해서다.
흥미로운 건 색다른 실험을 하고 있는 건물주들이 젊은이가 아니라는 거다. 대부분 70대 어르신이다. 건물주가 임차인을 위해 무언가 준비하는 건 1년 전만 해도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갑(건물주)이 을(임차인)을 위해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체 이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대앞, 3~4년 전부터 상권 죽어
이곳 상권이 죽은 이유는 복합적이다. 상가건물 맞은편에 있던 임시상가들이 사라진 게 첫째 이유다. 예전엔 상가들이 마주보고 있어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2010년 땅주인인 코레일이 이곳에 건물을 짓기 위해 펜스를 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예전에 없던 벽이 생긴 탓에 막다른 길처럼 보였고,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둘째 이유는 경기침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소비자가 지갑을 열지 않자 이 지역 상가들이 타격을 입었다. 값비싼 수입의류를 찾는 손님들은 당연히 줄어들었다.
더 큰 이유도 있다. 상권은 죽어가는데 정작 건물주는 이런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입주 상가의 매출이 어떻든 임대료는 꼬박꼬박 입금됐기 때문이다. 상인들이 ‘임대료를 못 내겠다’며 상가를 떠날 때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상인이 들어오면 그만이라고 여겨서다. 당연히 임대료를 낮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임대료를 못내는 상인은 갈수록 많아졌고, 가게를 보러 오는 사람도 부쩍 줄어들었다. 상권은 죽었고, 건물주의 지갑도 비어 갔다. 건물주들은 ‘무언가 하지 않으면 죽겠구나’라는 절박감에 휩싸였다. 그렇다고 건물을 팔 수도 없었다. 죽은 상권에 있는 건물을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거니와 헐값에 팔기도 싫었다. 더구나 건물주 대부분은 이곳의 터줏대감이었다. 한옥을 헐고 건물을 지은 이들이 대다수였다. 건물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바로 그때, 건물주 가운데 그나마 젊은 김용진(62) 이대골목주민조합 대표가 총대를 멨다. “더 이상 이렇게 해선 안 된다”며 다른 건물주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논리는 이랬다. “을乙이 있어야 갑甲도 있다. 상권을 만드는 건 건물주가 아니라 임차인이다. 임차인들이 살아야 건물주도 살 수 있다는 얘기다. 건물주가 욕심을 버려야 공생의 길이 열린다.” 건물주가 생각을 고쳐먹지 않으면 공멸할 수 있다는 경고 시그널이었다.
20여년 동안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던 김용진 대표는 지난해 귀국했다. 사업차 영국•독일 등 선진국을 수없이 돌아다닌 김 대표는 흥미로운 모습을 목격했다. 주민이 공생하면서 마을을 가꾸는 모습이었다. 건물주인 그가 건물주의 변화를 촉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힘 있는 사람이 무언가를 먼저 놓지 않으면 공생이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 대표의 주도로 조합은 임대료부터 현실적인 수준으로 낮췄다. 그러나 다음이 문제였다. 골목길을 정비하려 해도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서울시를 방문해 문의했는데, 뜻밖에도 도움의 손길이 다가왔다.
임대료, 반값으로 대폭 인하
서울시가 지난해부터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선순환하는 상권이 될 수 있도록 컨설팅을 해주고, 지원금까지 준다는 데 건물주들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건물주들은 마을공동체 사업공모에 지원하기로 했다. 서울시에서 주 2~3회 일평균 3시간가량 진행하는 마을공동체 교육도 열심히 들었다. 1박2일로 진행된 워크숍에도 참여했다. 김 대표와 건물주들은 거기서 또 다른 원군을 만났다. 30대 초반의 오정익 얼티즌(Eartizen)카페 대표다. 그가 없었다면 조합은 임대료를 낮추는 방안밖에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언급한 것처럼 젊은층을 유인해 상권을 살리는 방안은 누구도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년커뮤니티인 얼티즌카페는 2007년 6월 오픈했다. 오정익 대표는 희망을 잃은 젊은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꼈다.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청년들이 소외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양한 방면으로 청년의 참여와 활동을 이끌어보자는 취지에서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을 모아 카페를 만들었다.
사업•이벤트•강좌 등 활동분야가 워낙 다양해 이 카페를 한마디로 표현하긴 어렵다. 하지만 카페명을 보면 얼추 이해가 간다. 얼티즌은 ‘지구(Earth)’와 ‘시민(Citizen)’의 합성어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갖고 책임감 있는 활동을 모색해 실천하는 시민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 오 대표가 건물주를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나’라면서 서울시를 찾았다가 교육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건물주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더구나 얼티즌카페는 젊은층이 좀 더 많이북적대는 곳에 오프라인 카페를 오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단순한 카페가 아니었다. 젊은 1인 기업가들에게 커피 한잔 값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무공간을 내주자는 취지에서 구상한 카페였다. 다만 젊은이가 몰리는 곳은 임대료가 비싸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오 대표는 올 4월 이곳에 입주했다. 건물의 2~3층을 모두 임대해 2층엔 카페를 차리고 3층엔 주거공간을 마련해 2명의 얼티즌카페 회원들과 생활하기 위해 내부공사를 진행했다. 김 대표는 다른 아이디어도 냈다. 얼티즌카페의 모델을 적용하자는 거였다. 그의 아이디어는 이랬다.
마음 비우니 응원군도 생겨
“젊은이가 건물에 들어와 살고, 상가가 젊은이를 겨냥한 품목을 판다면 고정수입은 확실하다. 또 이대 쪽은 의류상가가 많다. 차별화를 하려면 이대 상권에 많지 않은 먹을거리를 공략하는 게 적당할 것 같다. 젊은이들이 원하는 먹을거리로 상권을 조성하고, 주거공간은 젊은이들 취향에 맞게 바꾸자는 거다. 골목에 젊은층이 북적이면 또 다른 다른 젊은층이 따라올 게 분명하다.”
조합이 서울시에 제출한 마을공동체 제안서의 기본계획은 이렇게 나왔다. 이 제안은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에 선정돼 현재 추진 중이다. 계획대로 사업이 진행된다면 갑(건물주)과 을(임차인)이 공존하는 마을이 탄생한다. 갑과 을이 도움을 주고 받는 ‘공생마을’이다. 죽어가던 상권엔 활력이 감돌고, 이는 다시 갑과 을에게 수익을 선물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건 건물주의 변화다. 갑의 위치에 있는 건물주가 임대료라는 ‘기득권’을 놓지 않았다면 이 조합은 탄생하지 못했을 거다. 물론 건물주들이 ‘임차인이 죽든 말든 우리는 임대료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고쳐먹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3~4년의 수익공백이 가장 결정적이었다. 바꿔 말하면 꾸준한 수익이 나면 건물주의 생각이 바뀌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 홍대앞 풍경이 그렇다. 홍대앞은 젊은 예술가들이 꿈을 펼치는 공간이다. 그 문화를 기반으로 상권이 형성됐다. 하지만 지금 홍대는 이전과 딴판이다. 예술공간은 자취를 감추고 특별할 것 없는 술집과 카페가 둥지를 틀었다. 예술을 꿈꾸던 이들이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옮겨간 곳은 문래동에 있는 공장 주변이다. 작품 소재나 재료를 구하기도 쉽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임대료가 싸서다. 원래 있던 상인의 상당수는 홍대앞 주요 상권의 주변부로 옮겨가고 있다. ‘예술의 거리’로 통했던 홍대앞 상권에 ‘예술’이 없다는 얘기다. 그저 유흥을 즐기기 위해 모인 사람들과 흥청망청 문화, 그리고 높은 임대료라는 껍데기만 남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주변부에서부터 공동체 문화가 다시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힘겹다. 홍대 특유의 문화를 지키고 싶어도 예술가들이 이젠 홍대를 원하지 않는다. 홍대앞 번화가에서 밀려나온 한 카페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건물주들은 임차인이 없어도 여전히 꿈쩍하지 않는다. 김용진 대표는 “배가 불러서 그렇다”며 “된통 겪어 보면 어떤 게 시대의 흐름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갑이 먼저 변해야 을이 춤춘다는 얘기다.
Issue in Issue ① 춤추는 숲, 성미산마을
공동육아로 시작해 스머프마을로 발전
서울시의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에 참여하겠다는 이들이 수없이 많다. 하나의 테마를 잡아 주민이 직접 마을을 가꿔가는 ‘우리마을 프로젝트’의 경우 지난해에만 200여개 팀이 신청했다. 그중 82개 팀이 선정됐고, 올해 초 사업을 마무리했다. 올해에도 1차 공고에서 74팀, 2차 공고에서 58팀이 선정돼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만큼 주민 만족도가 높다는 것이다.
사실 서울시가 추진하는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의 롤모델은 서울에 있다. 1994년부터 자연스럽게 조성된 성미산마을이다. 이 지역 주민은 처음엔 공동육아를 위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어린이집을 만들었다. 교사는 주부들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맡고 있다. 아이들은 나지막한 성미산을 마당과 놀이터 삼아 뛰어논다.
2004년엔 대안학교를 만들었다. 유기농 재료로 만드는 반찬가게, 쉬었다 갈 수 있는 카페도 직접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판매를 하는 이들은 모두 주민이다. 수익금은 마을공동체 발전을 위해 사용한다. 모두가 마을 주민이다 보니 CCTV도 필요 없다. 수십 개에 달하는 커뮤니티가 필요에 의해 생겨나고 없어지면서 마을이 커지고 있다.
일부 주민은 틀에 박힌 아파트가 아니라 원하는 집에 살고 싶다며 독특한 형태의 빌라를 만들었다. 층별로 각자가 원하는 구조로 만들어져 지금껏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을 띠고 있다.
물론 갈등도 있었다. 2008년 홍익재단이 성미산을 깎아 학교를 짓겠다고 하면서 재단과 마을 주민이 갈등을 빚은 것이다. 결국 아이들의 놀이터인 성미산은 20% 정도가 깎여 나갔다. 이 일을 계기로 마을 주민의 연결고리는 더욱 탄탄해졌다.
무분별한 개발 논리에 맞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마을을 만들고 있는 성미산마을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올해 5월말 개봉한 ‘춤추는 숲’이다.
Issue in Issue ② 서울시 마을공동체 지원사업
정부•지자체 아닌 주민이 만드는 마을
마을공동체 지원사업(마을 지원사업)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시장직을 맡기 10여년 전부터 다양한 마을공동체 사례를 검토하며 구상해온 사업이다. 마을공동체 프로젝트는 지금껏 작은 도시나 시골을 중심으로 추진됐다. 해외 역시 다르지 않았다. 서울시의 마을 지원사업처럼 대도시에서 추진하는 경우는 유례가 없다. 서울시가 세계 최초다.
마을 지원사업은 정부나 지자체의 주도로 마을을 개발하는 게 아니다. 주민 스스로 동네를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한다. 예전처럼 이웃끼리 음식을 나눠 먹고, 같이 어울려 놀기도 하며, 해당 지역의 크고 작은 의사결정도 스스로 하는 마을을 도심에 심는다는 계획이다. 지원사업 분야는 공동육아•마을기업•상가마을공동체•청년마을활동•마을예술창작소•마을 북카페•에너지자립마을•안전마을•아파트마을공동체 등 15개에 달한다.
일단 동네 주민이 최소 5명(커뮤니티 공간운영은 3인 이상)만 모이면 무엇이든 제안할 수 있다. 아이디어만 있으면 교육관이 직접 찾아가 교육을 진행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아이디어를 바꿀 수 있도록 컨설팅을 해준다. 협동조합을 만들어 마을기업을 만들 수도 있고, 악기 연주를 위한 동호회를 만들 수도 있다. 골목길을 예쁘게 꾸미겠다고 해도 상관없다.
공공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동네 주민이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대전제에만 부합하면 된다. 예컨대 지난해 10월 범죄가 많던 마포구 염리동 골목길을 주민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바꿔 범죄예방 효과를 높인 ‘소금길’은 서울시의 지원사업이 지향하는 바를 잘 보여준다.
물론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센터를 통해 교육을 받아야 한다. 지속가능한 마을공동체 조성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주민이 신청하면 센터 담당자가 직접 방문해 교육하고, 1박2일의 워크숍 등을 통해 심화교육을 실시한다. 서울시는 석달가량의 전문교육을 실시해 마을공동체 리더도 양성하고 있다.
제안내용이 선정되면 적게는 100만원부터 많게는 6000만원까지 지원금도 나온다. 제안서가 지원사업의 조건에 맞지 않는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부족한 조건만 충족하면 지원대상이 된다. 서울시는 올해 마을 지원사업에 26억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김정덕 기자 juckys@thescoop.co.kr|@juckys3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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