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부가 함경도를 수복하다
정문부가 함경도를 수복하다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 호수 45
  • 승인 2013.06.03 08: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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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31회

이여송은 나라가 이렇게 될 때가 있느냐 하고 통곡했다. 호조판서 이성중과 경기감사 이정형도 참았던 분과 설움이 터져 나와 걷잡지 못하고 통곡했다. 남의 나라의 일개 육군제독에게 일국의 원로상국이 치욕을 보게 됐으니 참으로 분통한 일이었다.

   
 
임진강에서는 유성룡이 명군을 지체하지 아니하게 하려고 밤낮 군사를 시켜 수십척 배를 연쇄하여 그 위에 판자를 깔아 가교를 만들어 대군이 말을 타고 지나가게 하였다. 이여송의 대군이 파주 동파역에 다다른 것이 그날 석양이었다. 그 이튿날 조선장수 고언백이 부하병 300명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고 사대수가 마병 800명을 거느리고 뒤를 따라 적의 동정을 살피기로 하였다. 고언백 사대수의 군사가 벽제관을 지나 박석薄石 고개와 혜음惠陰 고개 사이에서 일본군의 정찰대와 마주쳐 싸워서 적군을 100여급을 베었다는 보고가 왔다.

이여송은 이 보고를 받고는 그만 경적지심輕敵之心이 생겨서 자기의 가정1)과 수병手兵 약 1000기만을 데리고 질풍과 같이 달려가 혜음령을 넘었다. 막 고개를 넘어서자마자 이여송의 탄 말이 무릎을 끌어 이여송이 낙마하였다. 따르던 장졸이 놀라 이여송을 붙들어 일으키고 이것이 무슨 흉조나 아닌가 하여 겁을 냈다. 그러나 이여송은 곧 다시 말에 올라서 앞을 나서서 달렸다.

대장은 한 나라의 사명2)이어서 사직 흥망이 그에게 매어져 있다. 고로 승패간에 반드시 전조前兆가 있는 법이니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신립의 낙모落帽와 이여송의 낙마가 이것이다. 전례를 들면, 경변瓊弁을 주지 않아 자옥子玉이 패하고3), 큰 뱀을 죽여 한고조 유방이 흥하고, 말이 나아가지 않음에 초패왕 항우가 망하고, 큰 별이 떨어져 제갈공명이 생을 마치고, 공작이 옷을 물어 단도제檀道濟가 죽고, 꿈에 두 마리 개가 말함에 악비가 옥에 갇히고 한 것이 다 이런 것이니 장수가 된 자는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이여송의 낙마하는 모습을 본 그의 부하는 이여송에게 진언하되 “선봉도 공을 탐하고 적을 가벼이 보면 될 리 있소? 하물며 대장이야말로 하며 말이 무릎을 꿇어 노야가 낙마하니 이 어떤 전조일까. 엎드려 바라오니 노야는 대군을 기다려 진군하십시오” 하였으나 이여송은 불청하고 박석고개가 보이는 곳에 이르러서 일본군사 수백명이 있는 것이 보였다.

명병이 오는 것을 본 일본군사는 마치 달아나는 듯이 박석치에서 겁내어 당황하는 모양을 보였다. 이여송은 평양에서 승전한 뒤로 또 한성의 적병이 자꾸 달아난다는 풍설을 신용하여 적의 형세도 염탐해보지도 아니하고 군을 좌우익으로 나누어 박석고개 위로 올려 몰았다. 고개 너머로부터 1만여명의 일본군이 긴 칼을 번득이며 고함을 치고 돌진하였다. 이여송은 불의에 대군을 맞아 싸우게 되어 명병은 무서운 생각이 났으나 칼과 창이 맞부딪힐 지경이 되었으니 아니 싸우고 어찌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여송의 군사는 1000여명뿐이요, 대포도 독연毒煙도 없고 가진 것이 오직 칼뿐이었다. 그런데 소조천융경의 군사는 거의가 일본의 관서關西무사들이며 칼 길이가 3척이 넘고 3000명씩 편대를 조직한 6번조로 나누어 합 1만8000명의 대군이었다. 번차 번차로 번갈아 나와 들어 명병을 치는 바람에 명병은 칼도 짧고 군사도 적어서 당치 못하여 반수 이상이 전사하였다. 이여송은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음을 보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죽다가 남은 명병도 항오를 잃고 달아났다.4)

파주로 돌아온 이여송은 패하였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도 아니하나마 심히 기상이 죽어서 밥도 잘 먹지 아니하고 금일 박석치 싸움에 전사한 가정들과 사랑하던 표하標下 이유승李有升 등 용사 팔십 위인들을 생각하고 후회하여 통곡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제독 이여송은 그 성품과 장수로서의 지략이 조선의 대장 신립과 흡사한 점이 많다. 실로 대등한 인물이었다. 전승하고 나서 적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병법에 이르기를 상서롭지 못하다 하더니 지금 이 전투를 보니 과연 그렇도다. 이런 고로 이순신공은 항상 제장들에게 경계하되 “늘 이기는 부대는 적을 얕잡아보는 폐해가 있어서 해이하고 소홀해지는 버릇이 점차 생기는 법이니 삼가라”는 명령이 이를 단속함이었다.

이여송이 벽제관에서 패하여 돌아와 동파로 후퇴한다고 주장하였다. 여태까지 이여송을 권하여 진군하도록 애쓰던 유성룡은 우의정 유홍 도원수 김명원 순변사 이빈 등을 데리고 이여송을 방문하였다. 유성룡은 이여송의 앞에 나아가 온화한 얼굴로 “승패는 병가의 상사에 늘 다시 형세를 보아 싸우는 것이 늦지 않거든 어찌 가벼이 후퇴하려 하시오?” 하고 퇴군에 반대하는 뜻을 표하였다.

이여송은 유성룡의 말이 작일 박석치 싸움에 패한 사실을 의미하는 말이 있는 것을 듣고는 호승지벽이 강한 이여송은 노기를 띠며 “지기는 누가 져? 지다니? 이겼지! 어제도 우리 군사가 적을 많이 죽여서 싸움에 이기지 아니하였나?” 하고 소리를 질렀다. 유성룡은 눈치 밝게 말을 이어 “안 졌다면 더구나 퇴군할 까닭이 없지 아니하오? 이제 퇴군한다면 적이 반드시 오만심을 내어 천병天兵이 싸움을 겁내 물러났다고 능멸하지 아니하겠소?” 하고 유성룡은 힘써 다투었다.

퇴군할 수 없다고 버티는 유성룡

   
▲ 유성룡은 죽기를 무릎쓰고 이여송에게 퇴군의 불가를 역설했다.
이여송은 억지로 “이곳이 비가 많이 와 땅이 질어서 대군을 머물러 유진하기에 합당치 못하니 동파에 돌아가 잠시간 군사를 쉬여서 다시 싸운다는 말이야” 하였다. 그러나 이여송은 겉으로는 뽐내어도 실상은 일본군의 전술이 무서웠다. 유성룡 등은 여러 말로 퇴군하는 것이 불가함을 역설하였으나 명나라 제장들은 이여송에게 퇴군하지 아니치 못할 것을 주장하고 동의하였다.

이여송은 명나라 황제에게 올리려 하는 상주문의 초고를 내어 유성룡에게 보였다. 유성룡이 받아본즉 “적병이 한성에 아직도 20만이나 있어 중과부적입니다” 하는 구절이 있고 끝에는 “신은 지금 병이 심하니 청컨대 타인으로 대신하게 하십시오” 하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어제께 벽제관 실패 이후로 일본군이 아직도 많다고 거짓말을 지어내어 황제를 기망하는 말이다. 유성룡은 놀랐다. 유성룡은 손가락으로 “적군이 20만”이라는 구절을 가리키며 “적병이 20만이라니 웬 20만이오? 기실은 3만~4만도 못 되거든 무슨 20만이오?” 하였다. 이여송은 유성룡의 말이 귀찮은 듯이 “20만인지 3만~4만인지 내가 알 수 있나? 너의 나라 사람들이 그렇다니까 그렇지” 하고 발을 굴렀다.

곁에 섰던 장세작이 이여송에게 진언하되 “조선 놈들의 말을 들을 것 있소? 어서 퇴군하셔야 하오” 하고 유성룡의 무리를 노려보았다. 순변사 이빈이 크게 분개하여 “퇴군이라니 안 될 말이오. 그래 황제폐하가 노야에게 대군을 맡겨 보내실 때에 한 번 싸워보고 지면 곧 퇴군하라고 하셨소?” 하고 나섰다. 이것은 이여송이 평양에서 소서행장을 놓친 것은 조선장수들이 잘못한 것이라 하여, 이일은 장수감이 못되고 이빈을 오히려 장수의 재목이라 하여 행장을 탈주케 한 허물을 덮어씌우면서도 이빈의 자격을 인정한 일이 있었던 것이었다.
장세작이 발을 들어 이빈의 등을 냅다 차서 이빈은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하였다. 장세작은 “이놈들, 다 나가! 그렇게 퇴군하기를 싫어하는 놈들이 왜 부산에서 의주까지 한 번도 옳게 싸움도 못하고 달아나?” 하고 조선군의 단점을 찔러 호령하였다.

이여송은 벽제관 일패 후로 병마를 이끌고 그날로 임진강을 건너 동파로 오고 그 이튿날 또 동파를 떠나 개성으로 돌아오려 하였다. 유성룡은 죽기를 무릅쓰고 이여송에게 퇴군의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이여송은 유성룡에게 퇴군 아니하기를 약속하였으나 유성룡이 이여송의 진문 밖에 나선 지 한 시간이 못되어 이여송은 말을 타고 개성으로 향하고 그 부하 제장은 총퇴각을 하였다. 오직 부총병 사대수와 유격장군 모승선母承宣이 수백기씩을 거느리고 임진강을 지킬 뿐이었다.

이여송의 군사가 개성에 들어오매 군율이 엄숙하지 못하여 장졸들이 함부로 방자하게 여염집에 출몰하여 시정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를 겁간하여 민중은 또다시 이산하기 시작하였다.

접빈사 유성룡은 동파에 머물러 있어 날마다 서신을 보내어 이여송에게 약속한대로 진군하기를 간청하나 이여송은 들은 체도 아니하였다. 그리고 군량 마초만 대라고 성화같이 재촉만 한다. 명나라 청병을 해온 것이 마치 강도단을 데리고 온 것이라 하여 후회하였다. 그때에 명병의 해가 일병보다 심하다는 풍설이 흔하게 전파되었다.

하루는 이여송이 전군을 거느리고 개성서 또 후퇴하여 평양으로 물러가려 한다고 하는 말을 유성룡에게 전하는 이가 있었다. 유성룡은 최후로 한 번 더 퇴군의 불가함을 말할 작정으로 말을 타고 동파에서 개성을 향하였다. 중로에 다다랐을 때에 개성쪽에서 명병 십여명이 질풍같이 말을 몰아오더니 유성룡의 일행을 보고 “유체찰사가 누구냐?”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유체찰사요” 하는 유성룡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명병중에 두목인 듯한 자가 가죽 채찍을 들어 유성룡이 탄 말을 후려 때렸다. 유성룡의 말은 불의에 변을 당하여 4굽을 안아 뛰었다. 유성룡도 채찍 끝에 맞아서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명나라의 하졸에게까지 멸시받는 내 나라의 처지를 우는 눈물이었다.

유성룡은 놀라 닫는 말을 간신히 진정하고 고개를 돌려 뒤따르는 명병에게 연고를 물으려 할 때에 둘째 번 채찍이 유성룡의 면상을 향하여 떨어졌다. 두 눈이 아득하여 하마터면 52세 된 노인이 기절하여 땅에 떨어질 뻔하였다. 명병들은 유성룡의 등과 말을 수없이 때려 순식간에 개성부에 당도하였다.

명병들은 이여송의 진문 밖에 가 유성룡을 마상에서 끄집어내려 군뇌軍牢 사령이 죄인을 잡아들이듯이 유성룡의 덜미를 짚어 궁둥이를 발로 차서 이여송의 장막 아래에 꿇렸다. 곁에는 벌써 호조판서 이성중李誠中과 경기감사 이정형李廷馨[감사 권징은 물러났다]이 꿇어 앉아 군량 거행을 태만히 한 죄로 이여송에게 힐책을 당하는 중이었다.

유성룡이 잡혀 온 것을 보고 이여송은 소리를 높여 “네가 일국 정승이 되어 황군의 군량 거행을 등한히 하였으니 네 죄가 죽어 마땅하다. 군법으로 시행할 테니 그리 알라!” 하고 호령하였다.

유성룡은 사과하여 말하기를 “잘못 되었소. 그러나 태만한 것은 아니오. 멀지 않은 시일 내에 군량실은 배가 들어 올 것이오” 하고 눈물이 쏟아져서 걷잡을 수가 없고 마침내는 소리를 내어 통곡하였다. 나라 일이 이렇게 될 때가 있느냐 하고 통곡하였다. 호조판서 이성중과 경기감사 이정형도 참았던 분과 설움이 터져 나와 걷잡지 못하고 통곡하였다. 남의 나라의 일개 육군제독에게 일국의 원로상국이 이러한 치욕을 보게 되니 참으로 통분한 일이었다.

일국의 원로수상이던 이가 이러한 천대를 당했음에도 저들 대관이란 무리는 자각자성하지 못하고 그래도 대명의존의 사대사상과 숭문천무하는 문약정치와 동서당쟁이니 하는 편 가르기의 악습을 벗어나지 못하니 탄식할 일이로다.

유성룡의 통곡 이여송에게 통하다

   
▲ 정문부는 유생 사림에게 의기할 것을 청하며 외적을 격파해야 한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나 이 통곡은 의외의 효과를 내었다. 이여송은 유성룡의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 그의 지위와 연령과 덕망을 생각하고 측은한 동정심이 동하여 자기 부하의 제장에게 대하여 “너희들이 전년에 나를 따라 서하西夏를 정벌할 때에는 전군이 오래 굶어도 감히 돌아간다는 말을 내지 아니하고 마침내 대공을 이루었거든 이번에 조선에 와서는 군량이 떨어진 지가 불과 며칠에 어찌 감히 돌아가기를 주장하느냐? 너희들은 가고 싶거든 다 가거라. 나는 적을 멸하지 아니하고는 아니 갈 터이다. 나는 마땅히 말가죽으로 내 시체를 싸려 한다!” 하고 호령하였다.

명나라 제장들은 이 의외의 견책에 황공하여 모두 이여송의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이윽고 강화로부터 군량 실은 배 수십척이 서강西江에 들어왔다. 주리던 조선군사까지도 양미를 배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여송이 퇴군하지 않겠다는 결심도 믿을 수는 없다. 그날 밤에 명제독 이여송은 도지휘사 장세작을 보내어 조선 도체찰사 유성룡을 청하여 주연을 베풀고 지나간 일 즉 채찍으로 때리고 군법을 시행한다고 협박한 일을 다 잊으라고 위안하고 퇴병하지 않을 뜻을 확언하였다. 유성룡도 웃는 낯으로 마음을 털어버렸다.

그런데 좋지 못한 흉한 소식이 들어왔다. 함경도로부터 온 사람이 말하기를 “가등청정이 함흥으로부터 양덕陽德 맹산孟山을 넘어 평양을 습격하려 한다”고 전하였다. 이여송은 퇴군할 핑계를 얻었다. 그는 곧 유성룡을 불러 말하되 평양은 근본이니 만일에 평양을 잃고 보면 대군의 귀로를 단절당할 것이니 퇴군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유성룡은 변명하되 그렇지 않으리라고 5번이나 다투었으나 듣지 아니하고 이여송은 부하 왕필적 이여매를 두어 개성을 지키게 하고 이여송은 대군을 몰고 평양을 향하여 떠났다. 떠날 때에 접반사 이덕형을 보고 이여송은 “대군이 가면 조선군은 고립무원할 것이니 조선군도 우리 대군을 따라 대동강 북안으로 피하자” 하였다. 이덕형은 답하되 “조선군은 일보라도 후퇴할 수는 없소” 하였다. 이여송의 군사는 평양으로 가 버렸다.

이때에 일본 명호옥 행영에 있는 수길은 평양의 패보를 받고 대로大怒하여 다시 6만군을 출동하여 석전삼성 증전장성増田長盛(마시다 나가모리) 대곡길계5)의 무리 일곱 장수를 보내는데 이달정종도 자원하고 따라 나왔다. 한성에 새로 들어온 6만군은 남산 밑에 본진을 두었다. 석전삼성 등 7명의 장수는 벽제관싸움 전에 들어온 것이라고도 하는 이가 있었다.

가등청정이 함경도에 있을 때에 민란이 일어났다. 북도 사람은 이씨조선이 되고부터 조정의 배척을 받아서 수백년 동안을 나랏일에 참여를 못하게 막았으므로 가슴에 품었던 불평이 이번 왜란을 기회로 하여 반기를 든 것이었다. 난민이 일어난 곳마다 지방관을 죽이고 물 끓듯 소요하였다.

이에 앞서 함경감사 유영립이 가등청정의 군사를 해정창에서 서로 만나 청정의 군사가 북병사 한극함의 군사 육진정병과 싸워서 형세 불리하게 되어 해정창의 창고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유영립은 “산돼지 잡으려다가 집돼지 놓치겠소!” 하고 급히 함흥감영으로 돌아갔다. 남병사 이혼도 갑산으로 들어갔다가 난민에게 잡혀 죽고 감사 유영립도 난민에게 쫓겨 가 산곡에서 잡혔다가 빠져 도망하여 행재소로 가버렸다.

이렇게 난민이 소란하는 통에 적장 과도직무는 함흥감영을 손쉽게 점령하고 청정의 군사도 육진기병을 야습으로 파한 뒤에 민란을 이용하여 아무 저항 없이 극북인 회령會寧까지 들어갔다. 회령 향리 국경인鞠景仁은 난민을 시켜 두 왕자의 일행을 잡아 청정의 진문에 바쳤다. 청정은 두 왕자 임해군 진 순화군 규와 그 일행인 김귀영 황정욱 황혁黃赫 이개李漑 윤탁연尹卓然의 무리 200여인을 잡아들려 청정이 그 결박한 것을 끌러 우대하고 두 왕자는 청정이 항상 음식 거처를 같이하였다.

제자 앞에서 눈물로 충의 호소한 정문부

   
 
청정은 국경인이 협조한 공으로 북도판형사北道判刑使라는 일본 벼슬을 시켜 북도의 치안을 유지하게 하고 청정은 육진도 모두 점령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 즉 번호의 6•7 부락까지 분탕한 뒤에 돌아와 국경인을 비롯하여 경성의 국세필鞠世弼과 명천明川의 정말수鄭末守의 무리로 하여금 일본제장과 함께 함경도 22군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두 왕자 임해군 순화군과 전 좌상 김귀영 이하 조선대관들을 데리고 안변으로 돌아 나와 유진하고 겨울을 났다.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는 본래 학문과 덕행이 있는 사람으로 함경도 내에 그의 제자가 많았던 터이다. 처음에는 정문부도 난민에게 잡혔다가 제자들이 구출하였다.

정문부는 여러 제자를 모아 놓고 눈물을 뿌리며 “이 같은 판탕지세에는 충의가 가장 크니, 삼남 각도와 경기 이북에는 곳곳마다 의기를 들고 일어나 충의의 도리를 다한다 하거든, 우리 북도 사람은 충의는 고사하고 난민이 곳곳마다 일어나 임금을 배반하고 수령과 장수를 살해하고 왕자를 포박하여 적에게 바쳤으니 200년간 나라의 은혜를 받던 신민의 명분이라고는 땅을 비로 쓸어보아도 없구나! 어찌 타도 사람을 대하리오? 지금이라도 우리 본도 내 유생 사림은 어서 의기를 들고 일어나 난민을 타일러 의를 향하게 하고 외적外敵을 격파하고 대의와 인륜을 바로 심자!” 하였다.

제자들은 감동되어 정붕수鄭鵬壽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原은 의병을 모집하고 강문우姜文佑는 선봉이 되어 난민을 해산하고 괴수 국경인 국세필 반적을 잡아 능지처참하고 격문을 도내에 날려 대의를 천명하였다. 그리고 정문부는 3만여의 대군을 모아 각처의 난민을 모두 평정시키고 종사관 원충서元忠恕 첨사 유경천柳擎天 권관 김경복金慶福 만호 한인제韓仁濟의 무리와 군사를 나누어 단천성端川城과 길주성吉州城을 에워쌌다.

길주성에 있는 일본장수 가등청병위加藤淸兵衛6)와 단천성에 있는 일본장수 가등좌위문加藤左衛門7)의 무리는 정문부의 대군을 대적하지 못하여 안변성에 있는 청정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길주성과 단천성 내에 농성하던 일본군사는 정문부의 동계작전에 에워싸인 지 90여 일 동안에 식량과 화약이 다하여 전멸이 되고 말았다.

함경도내에서 죽은 청정의 군사가 이 동계작전에서 3000여인이나 손실되었다. 한 자나 되는 눈이 녹은 뒤에 청정이 구원을 나섰으나 벌써 시기가 늦었다. 이때에 한성에 있는 총대장 부전수가가 평양의 실패 뒤로 각처 제장을 한성으로 불렀다. 청정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면목 없이 서울로 올라갔다.

이때 한성부근에 있는 조선군의 세력으로 전라감사 권율은 고양 행주에 유진하고, 순변사 이빈은 파주에 유진하고, 도원수 김명원은 임진강 남안에 유진하고, 체찰사 유성룡은 동파에 있었다. 이여송이 조선군까지 평양이북으로 끌고 가려 하던 것은 표면상으로는 조선군의 고립 무원한 것을 근심함인 듯하나 기실은 명병이 물러간 뒤에 혹시나 일본군을 쳐 이기지나 아니할까 하는 시기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벽제관 한 번 싸움에 명병의 예기를 좌절시킨 일본군은 평양에서 잃었던 기세를 회복하여 다시 임진강을 건너 개성을 무찌르려 하였다. 일본군의 계책으로는 명나라 대군과 결전하려면 먼저 한성 부근에 진을 치고 있는 조선의 각 장령의 군사를 소탕하는 것이 선결문제이며 숙청공작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중에도 행주산성에 진을 친 권율의 군사는 수원 독성禿城산성에 웅거하였을 때부터 일본군이 이기지 못한 강적이던 때문에 이를 먼저 격멸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성에서 지척인 행주산성에 이 강적을 두고는 임진강 이북으로 출병하기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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