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은 당시에 문무재라 하여 이순신 권율의 무리와 이름을 나란히 올렸다. 조정에서 장수의 추천에까지 오른 명사였다. 신장 8척에 모습이 웅장하고 용력이 절륜했다. 진주판관으로 창원ㆍ부산 등지에서도 여러번 전공을 세웠다.

그렇게 되었다면 중원을 들이치기는 어려우리라 하여 기회만 있으면 풍신수길을 설득하여 화친할 생각이 간절하던 때에 심유경의 서신을 반갑게 받았던 것이다. 심유경은 소서행장의 회답을 받고 곧 평양을 향하여 길을 떠나려 하였다.
심유경은 장정 3~4인만 데리고 태연자약하게 평양성을 향하였다. 소서행장은 대마도수 종의지ㆍ승 현소 등을 데리고 평양성 북쪽 십리에까지 나와 맞았다. 만장1)과 같은 오색 깃발을 드날리고 군사들은 창검을 들고 벌여 서서 그 찬란하고도 위엄스러운 것이 실로 장관이었다. 심유경이 말에서 내리자 일본군사가 에워싸는 것이 마치 그의 일행을 꼭 붙잡는 것과 같았다.
행장은 “대인은 100개의 칼에 에워싸여 있으면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으니 비록 일본 사람이라도 더할 수 없을 것이오”라는 말을 통역하였다.
심유경은 이 말을 듣고 더욱 자대심이 생겨서 이러한 말을 글로 화답하였다. “그대는 당나라 때 곽자의 공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소? 단기로 회흘의 수많은 군사들 속에 들어가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그대들을 두려워하겠는가?” 하고 심유경은 또 자기가 대명황제께 여쭈어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이니 한 50일만 기다리되 일본군은 평양성이북 10리 밖에 나와 약탈을 하지 말 것, 조선군은 평양부 경계 십리 이내에 들어가 싸우지 말기로 할 것, 이 두가지 조약을, 지금으로 말하면 정전협정과 같은 약관을 정하였다.
심유경의 하는 일은 모두가 황당하고 헤아리기 어려워 명나라에 의지하려는 심리가 많은 조선대관들 중에도 의혹을 가지고 보았다. 더구나 유성룡은 생각하기를 이 믿을 수 없는 작자 심유경이 반드시 무슨 일을 저지르고야 말 것 같다 하여 선조에게도 심유경의 말을 믿지 말고 마음에 늘 경계하기를 권하였다.

함경감사 유영립柳永立과 남병사 이혼도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게 되었다. 북도의 육진정병이란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한 것은 실로 당할 자가 없었다. 청정의 군사는 지탱하지 못하여 많이 죽고 해정창 창고 안으로 들어가 곡식 더미에 은신하고 조총을 쏘아서 육진병사들도 많이 죽었다.
주장인 한극함이 조총이 무섭다는 데 겁이 나서 그만 먼저 달아나니 이렇게 정강精强하던 육진 병마도 장수를 잃고 지휘자가 없어서 그만 무너져서 산으로 올라가 진을 쳤다.
남북병사와 감사가 다 산으로 모여서 장막을 치고 그날 밤을 지냈다. 초저녁에는 경비를 엄히 하였으나 밤중 이후에는 그만 곤한 잠이 들어서 야경도 못하였던 것이었다.
가등청정의 군사는 그날 밤중에 야습을 하기로 하여 밥과 술을 많이 먹이고 소리도 없이 산 위로 올라와 육진정병의 진을 에워쌌으나 우리 군사는 잠이 들어 깨닫지 못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안개가 자옥하게 끼어서 지척을 분별할 수 없는 중에 조총을 난사하고 달려드는 적병에게 우리 군사는 놀라 흩어져 도망을 하다가 방향을 모르고 늪지대에 빠져 거의 전멸이 되다시피 죽었다.4)
한극함은 남은 군사를 데리고 경성으로 달아나고5) 감사 유영립은 산골짜기로 달아나고 남병사南兵使 이혼은 갑산甲山으로 달아나버렸다.

이때 유성룡이 안주에 있어 사방에 글을 보내어 충의지심을 분발케 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를 장려하였다. 승려 중에 사명당 임유정은 금강산 표훈사 법당에서 승려를 모아놓고 불탑 앞에서 유성룡의 서신을 읽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일반이라 눈물을 뿌렸다.
승도들은 모두 사명당 송운대사의 의기에 감동이 되어 나아가 죽기로써 싸우기를 맹세하였다. 이에 사명당은 금강산 여러 사찰과 인근 각읍의 승려들을 모아 1000여명 승군을 거느리고 평양이북으로 향하였다. 사명당은 영남 밀양사람으로 진사까지 등과하였던 사람이다. 호는 송운松雲이니 일본의 사서에는 송운이라고 기록되었다.
평양에서는 고충경高忠卿이란 사람이 의병을 일으켜 평양의 적의 소부대를 기습작전으로 여러 번 격파하였다.
이때 명나라 유격장군 심유경이 일본선봉 소서행장과 오십일로 기약하고 명나라로 돌아간 뒤에 날짜가 다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을 본 소서행장은 의심이 새로 나서 그간에 심유경과의 체결한 조약을 지켜 50일 동안에는 평양성중으로 군사를 거두어 행동을 하지 아니하였으나 11월이 되매 “세시음마압강수歲時飮馬鴨江水 납일횡과요새풍臘日橫戈遼塞風”6)이라 하는 시를 지어 의주를 공격할 것을 선언하고 다시 호기를 부렸다.

이때 일본 비전의 명호옥 행영에서는 풍신수길이 경상도 연해에서 일본수군이 연해 실패하였다는 데 대하여 도저히 수군으로서는 이순신을 깨뜨리지 못할망정 경상우도에 있는 진주성이라도 육군으로 쳐 무찔러서 수전에 패한 분을 풀고 일본군이 어떠하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자는 뜻으로 수하 맹장인 세천충흥 가등광태加藤光泰(가토 미쓰야스) 목촌중자木村重茲(기무라 시게코레)7) 장곡천수일長谷川秀一(하세가와 히데카즈)의 무리 일곱 장수를 명하여 정병 2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나와 육로로 진군하여 험하고 견고한 진주성을 깨뜨리려고 서둘렀던 판이었다.
이 싸움은 진주성의 첫 번 싸움인데 진주목사 김시민이 주장이 되었던 때였다. 김시민은 그 당시에 문무재라 하여 이순신 권율의 무리와 이름이 나란하여 조정에서 장수의 추천에까지 오른 명사였다. 신장 8척에 모습이 웅장하고 용력이 절륜하였다. 진주판관으로 창원 부산 등지에서도 여러 번 전공을 세웠던 장수였다.
일본군이 진주로 쳐들어올 때에 김시민은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과 합세하여 군사 5000명과 민병 1만여명을 거느리고 성을 지키고 있었다.
진주병사 유숭인이 1000여기를 이끌고 성 밖에 멀리 나가 적이 오는 길목에서 싸우다가 대세를 당하지 못하여 패하여 쫓겨 와서 성문을 열어 달라고 하는 것을 김시민은 들어주지 않았다.
만일에 진주병사가 성안에 들어오면 주장이 바뀜으로 군심이 통일되지 못하여 요란할 것 같고, 진주병사로 말하면 비록 도내의 대장이나 패전한 죄가 있고, 장수되었던 나의 주권을 남이 되는 타인인 병사에게 내어준다 하면 성공을 할 수 있나 하는 관념으로 김시민은 문을 열어주지 아니하였다.

김시민은 처음 기병할 때로부터 염초 수천근을 구워 화약을 만들고 일본제를 모방하여 조총 70자루를 짓고 기타 현자포 질려포 진천뢰 등등의 뛰어나고 예리한 무기를 만들었다. 적병이 진주성을 에워싸고 밤낮 10여일을 맹렬히 싸웠으나 김시민은 임기응변하여 적의 제반 공성기구를 다 불살라 버렸으며 김시민은 군령이 엄숙하여 화살과 탄환을 함부로 쏘지 못하게 하고 밤이면 성의 네 문루에서 호적9)을 불어 한가한 태도를 보였다.
김시민은 적의 불의에 성문을 열고 의병장 김면 최강 이달李達의 무리와 더불어 풍우 몰듯 쳐나갔다. 적은 조선군사가 과감하게 성 밖에 쳐나올 줄은 꿈에도 알지 못하였더니 김시민이 대군을 몰고 나와 준비 못한 적을 엄습 대파하였다.
일본 전군은 미처 수족을 놀리지 못하고 반이나 죽고 적의 7장군도 겨우 살아 달아났다. 이 싸움에 김시민도 선두에서 맹렬히 싸우다가 적의 탄환에 이마를 맞아 중상을 입고 김해부사 서예원을 가목사를 정하여 자기의 병마를 맡기고 진중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10)
아까운 영웅이 중도에서 서거하니 나라를 위하여 애석한 일이었다. 후인이 시를 지었다.
명호옥에 있는 수길은 진주성의 패보를 또 듣고 대노하여 “너희들 7명의 장수가 일본의 국위를 또 손상하였다” 하여 큰 문책이 내려서 장곡천수일은 분이 나서 병으로 죽고14)그 남은 6명의 장수들도 심히 부끄러워하였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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