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신은 500척 대파하고 정운은 군사속 돌진하다
순신은 500척 대파하고 정운은 군사속 돌진하다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 호수 41
  • 승인 2013.05.03 11: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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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28회

이순신은 분기충천하여 대번에 적들을 무찌르지 못하는 것을 한하였다. 이제 육상의 응원이 없고는 종일 대전에 피폐한 수준으로 어찌 싸울 수가 없었다. 순신은 죽은 정운장군을 생각하며 눈물을 머금고 쇠를 울려 군사를 거두었다.

 
원균은 싸울 때마다 병선도 적다는 핑계로 뒤떨어져 있어서 화살이 미치지 않는 원거리에서 싸움하는 구경만 하고 있다가 순신 이억기의 군사가 이기고 나면 그제야 대들어서 적선을 깨뜨리고 적병의 시체를 물에 떠도는 것을 잡아 건져 올려 목을 베는 것으로 일삼을 줄만 알면서도 순신을 고맙게는 여기지 않는다. 이는 그 성품이 음험하고 편파적이어서 저보다 나은 사람을 까닭 없이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순신은 원균을 아니 데리고 갈 수는 없게 된 형세였다.

이날은 지난 6월에 승전하였던 전쟁터인 당포에 내도하여 하룻밤을 지냈다. 이튿날인 26일에는 풍우가 거세어 배질을 못하고 있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풍우가 그치게 되어서 웅천 제포 뒤 완포浣浦라는 곳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 8월 28일에야 순신이 파견하였던 정탐군이 육지 각처에 있는 적정을 염탐하고 돌아와 말하기를 “고성 진해 창원 각읍과 진주병영 등지에 머물렀던 적병들이 전라좌수사 사또의 함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이달 24, 25일경에 죄다 도망하여서 부산 등지로 가버렸습니다” 하였다. 이것은 수길의 명령으로 험고한 항만 심처로 물러나 지키면서 버틸 작정이던 것이었다.

순신은 이날 이른 아침에 배를 띄워 바로 김해 양산의 두 강 어구로 갔다. 우리 함대가 오는 것을 보고 백성들이 기리던 부모를 만난 듯이 기뻐하여 배를 타고 나와 환영의 뜻을 표한다. 그들은 제각기 적병에게 시달리던 이야기를 고하였다. 그중에 창원땅 구곡포仇谷浦에서 고기잡이하는 정말석丁末石이라는 사람은 김해강에서 삼일 동안이나 적에게 사로잡혔다가 도망해 나왔노라 하여 이러한 말을 고한다.

“김해 양산 두 강에 있던 적선이 백여척이나 되더니 이 2•3일 동안에 우리 함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떼를 지어 몰운대 밖으로 황급히 도주하여 나갔소. 그놈들이 창황하여 소란해하는 통에 소인은 밤을 타서 도망을 해 나왔소.”

이에 순신은 전함대를 가덕도 북안의 서변에 숨기고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과 광양현감 어영담으로 하여금 가덕도 밖으로 나가 숨어서 양산강 안에 정박한 적선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더니 신시 말이나 되어서 순신에게 보고가 오기를 종일토록 탐망하였으나 김해강과 양산강으로부터 적의 소선 4척이 나와서 동래 몰운대로 간 것밖에는 아무 선척도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양 강에 있던 적선은 거의 다 부산으로 철수한 것으로 판단하고 그날 밤을 천성보에서 지내고 29일 첫닭이 울 무렵에 행선하여 두 강의 앞 동래 땅인 장림포1)에 다다랐다. 마침 30여명 적병이 대선 4척과 소선 2척에 갈라 타고 양산강으로부터 나오다가 이 편 함대의 위세를 보고 놀라서 배를 버리고 육지에 뛰어내려 도망하여 버렸다.

공선만 남은 것을 본 원균은 항상 뒤지던 태도를 돌변하여 날뛰며 앞을 다투어 자기가 거느린 배를 몰고 달려들어 공선 5척을 깨뜨렸다. 적선을 보면 겁이 나서 뒤로 슬슬 돌던 원균이 이 공선에 대해서는 이 없는 작자가 호박국에 힘쓰는 격으로 의외로 용감하다고 제장들은 웃으며 비평하였다.

선제공격 회의 결과는…

▲ 이순신·이억기·원균은 회의 끝에 부산을 먼저 치기로 결정했다.
순신의 우후 이몽구가 원균의 행동을 보고 분노하여 노를 재촉하여 앞을 나서서 대선 1척을 깨뜨리고 머리 1급을 베었다. 이것으로 보아 아직 두 강 속에는 적선이 남아 있는 것을 짐작하고 주사를 두 부대로 나누어 양산강과 김해강으로 들어가 소탕하려 하였으나 강이 좁고 물이 얕아서 판옥대맹선을 용납하여서 싸울 수가 없으므로 초저녁이나 되어서 도로 가덕도 북안으로 돌아왔다.

밤을 지내는 중에 순신은 이억기와 원균을 자기의 기함으로 불러들여 삼도의 수군 제독이 모여 앉아 순신이 두 가지 문제를 제출하여 결론을 구하였다. 하나는 부산을 먼저 치나, 둘은 김해 양산의 두 강을 먼저 치나 하는 이 두 가지 문제였다.

원균은 두 강을 먼저 치자고 주장하고 이억기는 말하되 “우리 삼인 중에서 서로 맹세하고 좌수사 대감을 주장으로 추천하여 전군의 지휘권을 양도한 이상에는 오직 그 명령대로 청종할 뿐이지요” 하였다. 원균도 다시 이억기의 의견을 좇아 순신의 모략대로 하기로 표변하였다. 그렇게 되어 밤이 깊도록 토의한 결과에 순신의 말대로 두 강 깊이 들어간 곳에 비록 다소간 적선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우려할 것은 없을뿐더러 필시 우리 주사의 병위를 두려워하여 이 밤을 타서 부산방면으로 도주하였을 것이니 명일은 부산의 적의 본거가 되는 책원지를 총공격하기로 하여 삼인의 좌석에서 결정되었다.

그 다음날인 9월 1일은 경상감사 김수의 군사와 합력하여 부산의 적을 수륙군이 서로 호응하여 맹공격을 하자고 약속한 일자였다. 순신은 첫닭이 울 무렵에 출발하여 순신의 함대가 그 전군이 되고 이억기의 함대가 중군이 되고 원균의 함대는 후위가 되어 합 180여척이 서로 꼬리를 연하여 동을 바라보고 향하여 항해하였다. 몰운대 앞바다에 다다르니 때는 진시였다. 갑자기 동풍이 강하게 일어나 물결이 산같이 솟아 일렁거렸으나 그래도 배를 저어 동으로 동으로 강행 진군을 하여서 부산을 향하였다.

녹도만호 정운이 먼저 맞아 싸워 제장들도 협력하여 한 척도 아니 남기고 다 깨뜨리고 다대포 앞에 다다라 적의 대선 8척을 만났다. 이것도 정녕 두 강에서 밤중에 빠져나와 부산으로 도망하다가 역풍을 만나 주저하고 머뭇거리던 판에 광양현감 어영담이 맞아 싸워 제장이 합력하여 하나 아니 남기고 다 깨뜨리고, 서평포2) 앞바다에서는 적의 대선 9척을 만나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이 맞아 싸워 제장이 합력하여 한 척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깨뜨리고, 절영도 앞바다에서는 적의 대선 2척이 서 있는 것을 조방장 정걸이 맞아 싸워 제장이 협력하여 다 깨뜨렸다.

이러하여 몰운대에서부터 절영도 앞바다까지 오는 길에 적의 대선 합 24척과 그 배에 탄 적병 수천명을 하나 남기지 아니하고 모조리 당파했다.

순신은 함대를 절영도 앞바다에 유진하고 남아 흩어져 있는 적선을 모조리 나포한 뒤에 소선을 내놓아 부산진 선창의 동정을 탐망하게 하였더니 갔던 탐보선이 돌아와 보하는 바에 의하면 부산선창에 있는 적선이 대소합 500척이나 늘어섰다고 하며 이편의 탐망선이 온 것을 보고 적의 선봉인지 하는 대선 4척이 따라 나오더라고 하였다.

적선이 500여척이란 말을 들은 원균은 크게 놀랐고 이억기까지도 순신의 앞에서 난색을 보이며 200척도 다 못되는 우리 주사로써 500척의 적선과 싸우는 것이 어림없는 일이라 하여 중과부적을 말하며 주저하였다.

엄숙한 장령 “전멸하더라도”

순신은 팔뚝을 뽐내며 “당당한 우리 주사의 위세를 가지고 이번에 만일 적의 소굴이 되는 부산을 아니 치고 물러간다 하면 적은 반드시 우리 주사를 업신여길 것이니 그리 된다면 우리 일은 장차로 낭패될 것이오. 군사란 선성3)과 위세를 주로 하는 법이요, 병선의 다과에 있는 것이 아니오. 또 우리가 이미 이곳까지 온 이상에는 비록 싸워서 전멸을 당할지언정 아니 싸우고 돌아서지는 못하리라” 하고 순신은 손수 깃발을 들어 “부산진을 향하여 나아가 총공격하라!”는 엄숙한 장령을 내렸다.

이순신의 손에 들린 독전기가 부산진을 가리킬 때에 우부장 녹도만호 정운,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 귀선돌격장 이언량,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중위장 순천부사 권준 등 다섯 장군이 병선을 몰고 앞장서서 풍우같이 달려들어 적의 선봉인 대선 4척을 순식간에 때려 부수고 화전을 쏘아 불살랐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대포소리는 산과 바다를 뒤집는데 살아남은 적병들은 곡성이 진동하며 물에 뛰어드는 적병들은 갈가마귀떼 같이 헤엄을 쳐서 육지로 올라서 달아났다.

이것을 보고 순신의 휘하 삼도 전군 166척은 기세를 얻어 예기 충천하여 북을 울리고 기를 휘두르며 장사진을 벌여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어 앞을 나서 부산진을 향하여 노를 재촉하였다. 오직 경상우수사 원균의 배 1척은 따라오는 듯하더니 슬그머니 뒤에 떨어져 싸움이 이길 듯하면 참전 협력하는 척하고 싸움이 질듯하면 먼저 빠져 달아날 방략을 세우고 적병의 시체나 떠나오거든 그것을 목을 잘라 공을 조정에 보하고 자기의 당파되는 대관들로 하여금 선조에게 공을 세웠다고 주상할 계획을 예정하고 힘써 그렇게 행동하였다.

전함대가 부산 포구에 들어서니 부산진성의 동쪽 오리쯤 되는 바닷가에 연이어 세 곳에 갈라서 둔박한 적선이 470여척이나 되건만 이편 함대의 위세에 눌려서 감히 마주나와 대항하지를 못하였다. 순신은 제장을 명하여 바로 나아가 그 470여척의 적선을 과감하게 맞닥뜨려 쳐부수라고 엄명하였다.

적군은 수전으로는 이기지 못할 줄을 알고 많이 배를 버리고 성안으로 달아나 들어가고 산으로 기어 올라가 거기서 총과 활을 쏘았다. 적병은 모두 산에서 6군데나 모여서 땅을 파고 몸을 숨겨서 싸우고 배도 큰 배에서는 호신하는 방패 속에 숨어서 총과 활을 빗발치듯 이편 병선을 향하여 내려 퍼부었다.

적들은 안예재상安藝宰相 모리휘원의 군사가 3만인이요 각처에서 모여든 군사가 또 6, 7만이어서 약 10만의 대병이었다. 적은 순신의 수군의 이 총공격에 대하여 필사적 반항을 하였다. 만일에 부산의 근거지를 상실한다면 조선병탄의 대사업은 영영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러하여 모리휘원은 전군을 독려하여 조총과 시석을 막 퍼부었다. 그러나 거북선이 선두에서 횡행하며 충돌하고 순신과 이억기의 제장선이 죽기를 무릅쓰고 사납게 돌진하여 각양 지•현자 및 승자총환과 장편전 유엽전이며 천•지자 대장군전과 화전 궁노로 치열하게 맞붙어 큰 싸움을 하였다.

불꽃 사이로 나타난 이순신의 8척

▲ 종일토록 격전하는 동안 부산선창은 온통 불과 연기뿐이었다.
근 500척이나 벌여 섰던 적함에서는 여기저기 불이 일기 시작하여 경각간에 100척이 훨씬 넘는 수가 불이 붙어 100여개의 불기둥과 연기 무지개가 하늘로 솟아오르기도 하고 물위로 퍼져나가 엉기어서 어떤 곳은 지척을 분별할 수가 없고 바닷물도 끓어오르는 듯하여 더위가 여름날같이 심하여졌다.

이편 사졸들 중에도 적의 탄환과 화살에 맞아 붉은 피를 품고 죽는 자 넘어지는 자가 수를 알 수 없었다. 순신은 친히 시석을 무릅쓰고 손수 북을 울리고 기를 휘둘러 싸움을 재촉하였다.
순신이 치는 북소리는 다른 북소리보다 훨씬 컸다. 그 북소리가 들릴 때마다 연기와 화광속으로 순신의 모습과 그 손에 들린 깃발이 장렬하게도 움직임을 볼 때마다 제장과 군사들은 우리 영웅 즉 우리 장수를 신뢰하는 충정에서 나오는 애국심에 죽기를 무릅쓰고 배를 저어 노를 재촉하여 다투어 적진을 헤치고 돌격 격전하였다.

적병은 이편의 필사적 맹공격에 견디지 못하여 모두 토굴 속에 몸을 숨겨서 머리만 내어놓고는 조총과 화살을 쏘고는 또 숨었다. 그러다가 이편의 화살에 맞아 언덕에 굴러 떨어지는 자도 있고 땅에 엎어지는 자도 있었다. 그러면 다른 군사가 나와서 토굴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이러는 동안에 6군데의 토굴의 흙이 피로 젖고 이편 배에도 피로 젖지 아니한 배가 없었다.

이렇게 종일토록 맞붙어 격전하는 동안에 어느덧 석양이 되었는데 부산선창은 온통 불과 연기뿐이요, 이따금 바람에 흩어지는 연기와 불꽃 사이로 이순신의 8척 웅장한 자태가 몸에 갑옷을 입고 머리에 황금 투구를 쓰고 손에 독전기를 두르면서 뱃머리에 우뚝 나선 것이 보일 뿐이었다. 바닷물에도 피가 붉은 무늬를 이루었으며 부산성중과 6군데의 둔보4)의 적은 점점 조총과 활 쏘는 것이 줄어들어가 해가 서산에 걸린 때에는 5군데의 참호토굴은 완전히 침묵해지고 부산성도 성문을 굳게 닫고 조용해져서 아무 항전력이 없어졌다.

우부장 녹도만호 정운은 마지막 적병의 주둔처를 깨뜨리려고 홀로 배를 저어 적선이 수풀같이 들어선 틈을 뚫고 들어가며 분전하다가 적의 탄환이 날아와 오른편 가슴을 뚫었다. 정운은 칼 든 손으로 누르고 갑판 위에서 쓰러졌다. 배를 젓던 군사들과 부하장사들이 놀라 배 젓기를 쉴 때에 정운은 왼손으로 흐르는 가슴 피를 움켜쥐고 벌떡 일어나 칼을 두르며 피를 품는 입으로 싸움을 재촉하여 말한다.

“어서 저어라. 어서 저어라. 이 부산 적군의 근거를 섬멸하여야 할 것이다. 어서 저어라. 어서 저어라.”

이러는 때에도 또 탄환 한 개가 정운의 왼편 가슴을 맞혀 등을 관통하여 정운의 뒤 5~6보 되는 갑판 위에 떨어졌다. 정운은 그만 전쟁을 마치기 전에 한을 머금고 갑판 위에 쓰러졌다. 사졸들이 정운을 안아 일으키려 하였으나 그는 벌써 숨이 끊어졌다.

순신은 정운의 배가 단 1척이 몸을 돌보지 않고 노기 탱천하여 적진 중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지급히 귀선돌격장 이언량을 명하여 그를 구출하라고 하였으나 거북선이 들어갔을 때에 정운은 벌써 죽었고 정운의 탔던 배에 녹도 사졸들도 개미떼같이 달려드는 적과 단병접전을 하여서 반수 이상이 죽고 상하고 하여서 단 10인이 남지를 못하였다. 이는 적병들이 이순신의 휘하에 제일 무서운 장수가 저희들 조총을 맞아 죽는 것을 보고 기운을 얻어서 금일의 패전한 형세를 만회하려고 서두르던 것이었다. 이언량의 거북선은 좌우전후로 몰려드는 적선을 좌충우돌하여 막 부수어 버리고 정운의 녹도 병선을 끌고 나왔다.

정운의 시신을 실은 녹도 병선이 순신의 탄 대장선 곁으로 왔을 때에는 이편이나 저편이나 양국 함대는 사실상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그것은 이편에서는 종일토록 싸움에 지쳤을뿐더러 이름이 높은 정장군의 최후를 애도함이요, 저편에서는 오늘 패전에 수백척의 병선과 만여명의 수륙군의 정예를 상실한 끝에 풀이 죽어서 그러함이었다.

적선에서는 이편의 큰 장수가 이날 종일토록 용감하게 싸워서 가장 무섭던 장수 한 사람이 죽은 줄 알고 또 황혼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보고 이편의 시석이 미치지 아니할 만한 곳에서 수천의 장졸이 말을 타고 칼을 번쩍거리며 시위 도전하였다. 그것은 마치 이편 군사를 육지로 끌어올려 육전을 하려는 계책인 듯도 싶어보였다.

순신의 제장 중에는 곧 상륙이라도 하여서 죽은 정장군의 분한을 풀려고 최후결전을 할 것을 주장하는 소장파의 군인도 많았으나 순신은 그렇지 아니하다고 설명하기를, 육지로 행군하여 같이 와서 협력 호응하여 싸운다 하던 경상도 순찰사 김수의 병마는 해가 다 지도록 오는 동정이 없고 또 우리는 수군이라 탈 말도 없고 육전에는 장검이 제일필수의 무기이인데 그것도 아직 부족하며 개전 이래로 육전의 경험도 적은 수군만을 가지고 오랫동안 준비하여 놓은 이 부산의 적과 이 밤에 달도 없는 초하룻날 밤에 육지로 오른다는 것은 100번 싸워 100번 패할 일만 있고 한 번도 이길 리 없는 모험적 행동이라고 설파하였다.

부산에는 각지에 흩어져 있던 적병들이 모여들어 부산진 성내에 있던 관사와 관청 및 사가를 헐어다가 성 동문밖에 평탄지에다가 터를 닦고 백여 가옥이나 되는 집을 건조하고 일본식 시가지를 만들었고 동서 산록에도 적장들의 저택을 지어 즐비하여 300 수십호나 되었다. 그중에 2층집도 있고 하여서 색칠한 담이 사찰인 듯한 큰 건축물도 많이 지었다.

정운장군 죽음에 슬퍼하는 이순신

이러한 광경을 볼 때에 이순신은 분기충천하여 대번에 이 적들을 무찌르지 못하는 것을 한하였으나 이제 육상의 응원이 없고는 종일 대전에 피폐한 수군으로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순신은 죽은 정운장군을 생각하고 눈물을 머금고 쇠를 울려 군사를 거두었다.

순신과 이억기는 역풍과 파도를 헤치고 밤 삼경에 가덕도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절영도를 지나고야 순신은 자리를 떠나 정운의 시신이 실려 있는 녹도 병선에 올라가 그 상한 곳을 만지며 애통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에 순신은 친히 제문을 지어 정운의 영구 앞에 산해진미의 제수를 차려놓고 제사를 집행하였다. 그 제문은 이러하다.

嗚呼 人生必有死 死生必有命 爲人一死 固不足惜 君獨可傷者 國運不幸 島人作孼 嶺南諸城 望風奔潰 長驅席捲 所向無前 千里關西 鑾輿播越 北望長慟 怒膽如裂 嗟我短拙 與君論難 披雲見曜 計定揮劍 戰艘相連 決死掛席 冒刃先登 四度報捷 是誰之功 恢復宗社 指日可期 豈意皇天不佑 毒丸遽及 彼蒼者天 理亦難究 回船更突 誓欲報怨 日且奄暮 風亦不順 未遂所願 平生之痛 豈過於此也 言念及此 痛若割肌 所恃者君 更將何爲 一陣將卒 痛惜無已 嗚呼 鶴髮在堂 已矣誰將 抱恨窮泉 曷時瞑目 嗚呼痛哉 才不展時 位不滿德 邦家不幸 軍民無福 如君忠義 古今罕聞 爲國忘身 有死猶生 長恨世間 誰識我心 念哀致誠 遙奠一酌 嗚呼慟哉

아아,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사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다. 사람으로 되어 한 번 죽는 것은 진실로 아까울 것 없지마는 유독 그대 죽음에 마음 아프구나. 국운이 불행하여 섬 오랑캐가 재앙을 일으켜 영남의 여러 성들이 바람 앞에 무너지고 적들이 몰아쳐 온 나라를 석권하니 향하는 곳마다 막을 자가 없었다. 천리 관서로 임금의 수레 옮기시고 북쪽 하늘 바라볼 때마다 길게 울며 분노하여 간담이 찢어진다. 내가 모자라고 서툴러 그대와 함께 의논하니 구름이 쪼개져 밝은 빛이 비치듯 하였다. 계책을 정하고 칼을 휘두르며 배를 이어 나갈 적에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서 나아갔으니 네 번이나 이긴 싸움 그 누구의 공이겠는가! 종사를 회복할 날도 멀지 않은데 어찌 뜻했겠는가. 하늘이 돕지 않아 탄환에 맞았구나. 저 푸른 하늘도 또한 이유를 알기 어렵구나. 배를 돌려 다시 싸워 원수 갚자 맹세했으나 날은 또한 어둡고 바람조차 불순하여 소원을 못 이루니 평생에 통분함이 이보다 더할쏜가. 여기까지 쓰고 나니 살 에이듯 아프구나. 믿을 바 그대인데 이제는 어이할까. 진중의 모든 장졸 원통하게 여긴다네. 아아, 집에 계신 어버이는 누가 장차 모실 건가. 황천까지 미친 원한 언제 눈을 감을 건가. 아아, 슬프도다! 그 재주 다 못 펴고 덕은 높되 지위 낮아 나라의 불행이요 군사 백성 복이 없다. 그대 같은 충의를 고금에 드물거니 나라 위해 던진 그 몸 죽어도 살았구나. 세상에 깊은 원한 누가 내 마음 알아주랴. 지극한 정성으로 한잔 술을 바친다. 아아, 슬프도다!

축문을 읽기를 다하매 순신이 뜨거운 눈물을 뿌리며 지기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마지아니하였다. 전군 장졸들도 통곡하여 곡성이 산해를 실색하게 하였다.

故忠壯公 鄭運의 忠烈은 觀於對李忠武公之問과 與其自誓劍銘에 已知其卓絶이온 況偉績大節이 何等凜凜가 薄暮層溟에 促櫓先登하여 使遮海之敵艘로 不得相抗하고 而運則殉矣하니 似此忠義는 可與日月로 爭光이로다

“충장공 정운의 충렬은 충무공의 물음에 대한 대답과 스스로 맹세한 검명劍銘을 살펴보면 이미 그 탁월함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그 위대한 업적과 큰 절개는 어찌 그리 늠름한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어둠이 깔리는 가운데 노를 재촉해 앞장서서, 바다를 가로막고 있는 적선들이 서로 대항하지 못하도록 하고 자신은 숨을 거두었으니 이 같은 충용은 일월과 함께 빛을 다투리라.”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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