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이 강을 건너는데 여울목을 지키던 조선 군사가 싸우지도 않고 성중으로 들어갔다. 정녕 무슨 비계가 있을 것이라 여기고 부벽루와 영명사 근방에서 머뭇거렸다. 을밀대로 올라갔던 척후병의 보고를 듣고서 성이 텅 빈 줄 알고는 소서군이 평양성을 점령했다. 조선군의 저항은 없었다.

선조는 이 말을 듣고 지방관을 불러 박천 군기고 속에 있는 마름쇠 수만개를 평양으로 보냈으나 그 마름쇠가 평양을 들어가기 전에 일본군이 대동강을 건너와서 평양성을 점령하였다.
유성룡이 평양을 떠나던 그날 밤에 도원수 김명원이 정병 400여명을 뽑아 별장 고언백高彦伯으로 기습 사령관을 삼아 밤 삼경에 부벽루 밑에서 능라도를 향하여 배로 건너가서 적진을 야습하기를 명하였다. 김명원의 이 꾀는 기묘하였으나 실행할 고언백이 겁을 내어서 일이 뜻대로 되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출정시간을 밤 삼경이라고 맞춰 놓은 것이 군사들은 약속한 시간에 모였으나 장수되는 고언백이 늦게 와서 적진에 당도하자 벌써 먼동이 터서 밝아온다. 적진에서는 여러 날 강을 건너지 못하여 지루한 생각이 날 뿐이오 그렇게 약한 조선군이 적극적으로 강을 건너와서 습격할 것은 꿈에도 없었던 것이다. 다들 새벽 늦잠이 들어서 아직 일어나지를 아니하였다.
장수 고언백은 앞을 나서지 아니하고 배에서 내리지도 아니하고 군사들만 가서 치라고 명하였다. 군사들은 머뭇머뭇하고 습격할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장수가 그 모양이니 누구를 책하랴. 그러니 군사들의 기운이 날 수가 없었다. 이때에 일각이란 시간은 무엇보다도 더 귀중한 이때에 이렇게 장수와 군사가 다 뒷걸음치고 주저하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손실이었다.
만약 이때에 도원수가 이순신이나 김시민이 되었으면 소서행장의 전군은 갑옷 조각도 남지 않을 뻔하였다. 아, 조선 조정의 용인지도用人之道여, 후인으로 하여금 개탄을 금하지 못하게 하는구나.
이때에 조선 군사 중에서 한 사람이 뛰어 나서며 칼을 빼어 두르며 앞을 나서서 적진 중으로 돌입하니 모든 군사들이 기운을 얻어 뒤를 따랐다. 그 앞장을 선 군사는 벽동의 장사 임욱경이었다. 임욱경은 적병이 자는 초막 하나를 습격하여 십여명을 베었다. 다른 군사들도 저마다 초막 하나씩 습격하였다. 이러는 통에 적의 제일진의 군사가 잠결에 반 정도는 죽고 나머지는 놀라서 잠을 깨어 일어났으나 미처 수족을 놀릴 새가 없었다. 이 모양으로 첫째 진의 적병 수백명은 거의 전멸이 되고 말았다.
백성 놔두고 도망간 도원수

소위 사령관인 고언백은 적군이 밀려오는 것을 보고는 그만 배를 돌려 달아나고 자기의 군사가 죽는 것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였다. 임욱경과 그를 따르는 몇십명 정병은 한 걸음도 뒤로 물러나지 아니하고 싸웠다. 나중에는 몇십명 정병은 다 싸워 죽었으나 오직 임욱경이 혼자 살아남아서 좌충우돌하여 십수명의 적을 더 베었다. 적병은 겹겹이 에워싸고 사면에서 칼로 쳤다. 그러나 임욱경의 충용과 검술에는 적병이 여러 번 뒤로 물러나고 물러날 때마다 몇 명씩 적병이 맞아 죽었다. 임욱경은 끝까지 분전하다가 적의 탄환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별장 고언백은 패전한 전말을 보고할 차로 평양성에 들어오니 성중에는 인적이 적적한데 대동관 객사 앞까지 들어오나 온통 빈집이 되고 말았다. 고언백은 다들 미리 달아났구나 생각하고 말을 달려 수안遂安으로 향하여 도망하여 가버렸다.
김명원은 고언백을 시켜서 적진을 치게 하였으나 도저히 이길 것 같지 아니하여 좌상 윤두수에게 도망하자고 권하였다. 그리고 도망하는 도리도 설명하였다. 도망하는 도리란 것은 첫째로 성문을 열어 백성들을 설득하여 성을 지킬 수 없는 이유와 피난할 곳을 알려 다 내보내고, 둘째로 군기와 군량을 흙속이나 물속에 넣어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이것이 김도원수의 여러 번 경험한 것으로 이 점에서 그는 도원수였다. 도망하는 무리들도 참 도원수의 합격자라고 웃으며 논평하였다.
김도원수는 이 권고를 하고 그는 백성들이 행여나 소란을 일으킬까 하여 미리 그 전에 먼저 달아나버렸다. 윤두수는 김명원의 건의대로 계명초에 성문을 열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다들 피난하라고 길로 다니며 외치게 하였다. 강물이 가물어서 물길만 알면 적이 건너올 것이니 다들 피난을 가라고 하고 일변으로 군기와 화약 등을 풍월루風月樓 앞 못물 속에 집어넣고 윤두수 이하 고관대작들은 캄캄한 새벽에 보통문普通門을 나와 순안順安으로 달아났다. 윤두수는 보통문을 나서서야 군량미 재고 10만석이나 쌓아 놓은 것을 불 지르기를 잊은 것이 생각이 나서 후회하였으나 그냥 달아나 버렸다.

월정 윤근수는 송당松塘 유홍과 같이 당파 싸움에는 맹장이다. 김명원의 호는 주은酒隱이니 비교적 위인이 공정하고 적을 상대하는 것과 사람을 다루고 일을 처리하는 데도 도원수 권율 이상이라는 정평이 있었으나 다만 달아나기 잘하는 버릇으로 많은 비평을 받았다. 이원익의 호는 오리梧里이니 신체가 단소하여 일척 삼촌 되는 도포를 입었다고 하여 키가 작기로는 조선서 유명한 재상이요, 그가 체찰사로 한산도에 다녀온 뒤로는 백암 이순신을 천하기재라고 하여 지기지우가 되었다. 정철의 호는 송강松江이라 하고, 이덕형의 호는 한음漢陰이라 하였다.
한음 이덕형은 예조판서로 평양에서 “성상은 이미 의주에 행차하셨으니 평양에서는 세자를 옹립하여 이같은 판탕1)의 시기에 옛날 당나라 숙종肅宗 황제의 영무지사2)를 행하자” 하고 자기네 서인끼리 말하다가 오음과 백사가 말하되 “이는 신하된 자의 입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고 핀잔을 주었다. 백사白沙는 이항복의 호이니 도승지로서 평양에 와서 병조판서에 올라 수륙군의 인사를 전형하는 권한을 장악하였다. 이때 유서애는 서인의 조정이 된 이 판국에 물 위에 기름처럼 되어 있었으나 그 아량과 경제經濟는 서인들도 태산북두와 같이 신뢰하였다.
6월 15일에 일본군은 왕성탄 여울목으로 건너오기 시작하였다. 새벽녘에 습격하여 왔던 고언백의 군사들이 건너가는 것을 보고 길을 찾은 것이었다. 왕성탄을 지키던 평안병사 이윤덕은 적군이 여울목을 건너오는 것을 보고 군사더러 화살 한 개 쏘아보라는 명령도 안 하고 말을 타고 성중으로 달아나버리고 그것을 본 군사들도 이윤덕의 뒤를 따라 평양성중으로 몰려들어왔다.
그들은 성중에 들어와 보니 아무 하나 없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순찰사 이원익은 밤중에 김명원의 밀서를 받아보고 이윤덕에게 말도 하지 않고 성중으로 들어와 버렸던 것이었다. 이윤덕은 윤두수 김명원 이원익 송언신의 무리를 가리켜 “이 몹쓸 문관놈들!”이라고 실컷 욕하고 군사들도 다 내어 버리고 필마로 달아났다. 군사들도 장수가 없이 되어 다 흩어져 버렸다. 참으로 나라 일이란 한심하게 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강을 건너는데 여울목을 지키던 조선 군사는 싸우지도 아니하고 성중으로 들어가는 것이 정녕코 무슨 비계나 있음인가 하여 곧 성중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부벽루와 영명사永明寺 근방에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을밀대로 올라갔던 척후병의 보고를 듣고야 성중이 텅 빈 줄을 알고는 소서군이 비로소 입성하여 무저항으로 평양성을 점령하였다.
이때에 강원도 조방장 원호는 원주原州로부터 두 번째 여주에 이르러 적군이 구미포龜眉浦 강변에 진을 친 것을 보고 새벽 오경에 잠든 때를 타서 습격하여 풍우같이 오십여급을 베고 적을 대파하였다. 그러하여 여주 이천利川 양근 지평砥平 일대의 백성을 구하여 안도하고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원호의 자는 중영仲英이다]
옥포싸움서 대승하다

이순신의 옥포싸움의 대승첩이 있은 뒤에 또 원호의 구미포 승첩이 있고 강릉 이민환의 승전이 있어서 조선 사람에게 새로운 힘을 넣어 주었다. “일본군은 당할 수 없다”는 소리만 듣다가 이순신과 원호 같은 장수에게는 그들이 연전연패한다는 소문이 크게 전파하였다. 그렇게 되어 적에게 항복하였던 사람은 도로 후회하여 마음을 돌리고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은 기세를 더 얻었다. 전 만호 김태허金太虛는 전 현감 박홍춘朴弘春과 전 봉사 김응충金應忠으로 더불어 울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울산읍을 회복하고, 진사 정세아鄭世雅는 영천永川에서 기병하고 전 봉사 권응수權應銖는 신녕新寧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천의 적을 깨뜨려 신녕 의성義城 안동 등 여러 고을을 보전하였으며, 전 봉사 신해申海는 하양河陽에서, 전 봉사 최강崔堈은 고성에서, 전 출신3) 제말은 성주에서, 전 현감 여대로呂大老는 금산에서 각각 의기를 들고 일어나 의병을 모집하였다.
한림4) 김륵金玏과 한림 강찬姜燦과 전 참의 김용金湧과 조도사5) 변이중邊以中과 전 참판 유희림柳希霖과 전 현감 박여룡朴汝龍과 의병장 허국주許國柱와 의병장 유희경劉希慶과 길영吉詠과 문위文緯의 무리가 제각기 의병을 일으켜 각처로부터 일어나 서로 성원하여 각지에 흩어져 있는 적도들을 구축하고 기세를 올려 싸워 나갔다.
무예와 자격이 상당하다는 경상좌병사 이각이 울산성을 버리고 밀양으로 달아나고 또 경주로 달아나고 또 상주로 문경으로 일본군의 칼날을 피하여 자꾸 도망을 하였다. 경상감사 김수가 이각이 성을 버리고 도주한 죄상을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행재소에서는 선전관을 보내어 임진강에까지 도망하여 온 이각을 붙잡아서 목을 베어 형을 집행하고, 밀양부사 박진을 승직시켜 경상좌병사를 삼고 좌도 제장을 지휘하게 하였다.
박진은 한성 군기시軍器寺의 화포장火砲匠 이장손이란 사람이 발명해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라는 것을 얻어서 적의 근거인 경주성을 후일에 깨뜨렸다. 이 비격진천뢰라는 무기는 조선에나 중국에나 자고로 없던 것인데 이장손이 처음으로 발명해낸 무서운 무기였다.
이장손의 비격진천뢰는 이충무의 대장군전이라는 무기와 방불한, 즉 대포의 탄환처럼 된 것이다. 그 당시에 좌병사 이각도 대포를 발명하여 탄환 대신 돌덩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각은 전쟁에는 달아나기가 바빠서 한 번도 써보지도 못하였고 이충무의 대장군전은 당포전쟁 때부터 사용하여 적의 층각선 층루선들을 대번에 때려 부수었다. 이장손의 비격진천뢰는 탄환이 500, 600보를 날아가서 땅에 떨어졌다가 그 속에서 발화하여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며 폭발되어 철편이 무수히 날아서 일발에 30여인이 즉사하고, 맞지 아니한 주변 사람도 땅에 엎어져 정신을 잃고 일어나지 못하였다. 박진이 경주성을 공격할 때에 사용하였다 하나 이충무도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였다. 그 충무전서 중에 안골포 승첩한 장계에 기재된 것을 보면 이순신이 박진보다 오히려 사용한 일자가 앞선다. 그러나 이공은 기타 거북선 대장군전 등 귀신의 조화가 많아서 일일이 거론하지 않았다.
적군에게 빼앗긴 조선의 ‘평양’

충청도에서는 전 현감 조헌은 홍주洪州에서 창의하고, 계룡산鷄龍山 승려 영규靈圭는 승군을 거느리고 용감하게 싸웠으며, 또 김홍민金弘敏 이산겸李山謙 박춘무朴春茂와, 충주에 조덕공趙德恭 조웅趙雄, 청주淸州에 이봉李逢 같은 사람이 다 의병장으로 일어나 싸웠으며, 경기도에서는 우성전禹性傳 정숙하鄭淑夏, 수원水原에 최흘崔屹, 고양高陽에 이로李魯 이산휘李山輝 남언경南彦經 김탁金琢 유대진兪大進 이질李軼 홍계남洪季男 왕옥王玉같은 이가 다 의병장으로 일어났다.
이때에 승려 중에 사명당泗溟堂 송운松雲 임유정任惟政은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에서 참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산중에 들어오매 다른 중들은 다 달아나도 임유정만은 눈도 떠보지 아니하고 앉아 있었다. 적병들은 참선 오도悟道한 고승이라 하여 해치지 아니하고 그중에도 합장 예배하고 가는 자까지 있었다.
우리 조선의 금성탕지라고 자랑할 만한 평양성까지도 다 적군에게 내어 주고 선조는 영변으로 갔다가 다시 박천으로 가산嘉山 정주定州로 하여서 의주에 도착했을 때에는 의주성은 사람 없는 빈 성이 되어 있었다. 의주목사 황진黃璡, 판관 권황權湟은 다 달아나고 백성들은 피난하여 떠나가고 없었다. 그리되어 개나 닭의 그림자도 없고, 남아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가난한 자 병든 자 노약자 홀아비 같은 사람뿐이었다.
선조는 교리8) 이유징李幼澄으로 의주목사를 삼고, 따라온 신하 10여명을 거느리고 관아의 동헌과 용만관龍灣館으로 행궁을 삼았다. 선조는 동남쪽으로 멀리 서울 있는 데를 향해 통곡하고 오언시 일수를 지어 중신들에게 보였다.
평양을 점령한 소서행장 종의지 등 일본장수들은 많은 조선 사람을 매수하여 의주에 이르기까지 각처에 탐정을 늘어놓아 밤낮으로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래서 행장 의지의 무리는 연광정에 가만히 앉아서도 평양이북 각 군읍의 사정을 빤하게 알고 있었다. 소서군이 의주에까지 들어 치지 아니하고 평양에서 지체하는 것은 구귀가륭의 무리가 통솔한 수군 십만을 기다리기 때문이었다. 명나라의 관문인 의주를 칠 것 같으면 명나라를 놀라게 하여 명의 대군이 수륙으로 출동할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리 된다면 양국 연합군과 싸우게 될 것이니 일본도 수륙군이 서로 호응하여 함께 진격해야 요동 지방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수군함대는 경상도 연해에서 조선의 바다의 영웅 이순신의 솜씨에 연전연패하여 죽기가 바빴다. 그래서 또 제2차로 일본 명호옥 본영에서 대함대를 다시 파송하였다고 하니 그 해군이 조선 바다의 영웅 이순신을 격파하고 전라 충청 황해도의 바다를 완전히 손에 넣어 수륙군이 서로 응할 수 있게 되는 날을 기다리는 때문이었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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