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기가 살아온 세월만큼 설날의 추억을 갖고 있다. 10시간을 달려 고향에 가고, 가족이 둘러앉아 분주하게 음식을 만드는 모습은 설날 하면 떠오르는 풍경이다. 스마트폰 가입자 3000만 시대, 설날 풍경이 변하고 있다. 모바일 연하장을 보내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설 인사 글을 올린다. 달라진 설날 풍속도를 되돌아봤다.

설음식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 부침개다. 기름내가 솔솔 풍기면 식구가 하나 둘 부엌으로 몰려들었다. 전을 부치는 어머니 옆에 앉아 하나씩 집어먹으면 그렇게 맛날 수가 없었다. 찹쌀 반죽을 기름에 튀겨 조청을 묻힌 강정은 김씨가 가장 좋아하는 설음식. 입안에서 살살 녹는 강정을 먹을 때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설날 주전부리로 빠지지 않는 콩고물 잔뜩 묻힌 인절미도 좋아했다. 김씨는 “요즘엔 스마트폰으로 주문만 하면 차례상을 차려준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스마트폰이 설날 풍속 바꿔
# 전통의상을 공부한 정인영(가명ㆍ47)씨에게 한복은 각별하다. 새해 아침이면 설빔을 입었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다. 정씨는 어렸을 때부터 한복을 좋아했다. 알록달록한 색동저고리를 입으면 부잣집 아가씨가 된 듯 의기양양해졌다. 하지만 빠듯한 살림에 5남매 중 첫째였던 정씨에게 설빔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설날이면 한복을 입혔다. 설빔을 입은 정씨는 동생 손을 이끌고 동네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렸다. 친구들에게 새 옷 자랑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날은 설빔을 뽐내는 아이들로 동네가 시끌시끌했다. 그 시절엔 설날에 설빔을 입는 게 기쁨이고 즐거움이었다.
# 시골에서 자란 이강훈(가명ㆍ31)씨는 설날 아침이면 어른이 건넨 덕담을 기억한다. “강훈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건강해라. 부모님 말씀 잘 들어라.” 어른에게 덕담 듣는 게 일이었던 그도 이젠 조카를 챙겨줄 나이가 됐다. 덕담만큼이나 인상 깊은 건 제사다. 이씨가 제사를 추억하는 건 독특한 가풍 때문이다.
집안의 어르신은 제사를 지낼 때마다 편지를 썼다. 선조에게 안부를 묻는 거였다. 한자로 된 축문을 한글로 풀어서 썼는데, 내용은 이랬다.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서 음식과 술을 올립니다. 편안하게 계시다 가세요.” 누군지도 모르고 절만 해왔던 이씨는 편지에 귀를 기울이면서 사진의 주인공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해했다. 그는 “고인에게 인사를 하는 건 의미있는 일이란 걸 그때 알았다”고 말했다.

스마트폰은 생활의 본질을 바꿨다. 설날을 맞아 오랜만에 친척과 만났지만 집안 분위기는 이전과 확연히 다르다. 세뱃돈을 받고 신난 어린 조카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없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은 장난치느라 시끌벅적했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세뱃돈을 받고 좋아하는 건 잠시다. 이내 스마트폰 화면 속으로 빠져든다. 간간히 큰소리가 난다. 중학생 오빠와 초등학생 여동생이 서로 부모의 스마트폰으로 게임하겠다고 싸워서다.
어른도 예외는 아니다. 차례를 지내고 거실에 모였지만 조용하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반가울 법도 한데 대화는 좀처럼 이어지지 않는다. 각자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를 들여다보느라 대화가 줄어든 것이다.
LG유플러스에 따르면 2011년 설 연휴 데이터 통신량은 2010년보다 300% 증가했다. 가족과 모인 자리에서 SNS나 인터넷을 한 결과다. 쉬는 날이라는 이유로 눈치 보지 않고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에 빠져든 것이다.

스마트폰의 원동력은 통신기술이다. 통신기술이 발전해온 만큼 새해 인사 방식도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연하장 대신 스마트폰으로 인사를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PCS폰의 등장과 함께 설날 인사는 문자로 대체됐다. 이모티콘을 넣은 단문메시지(SMS)가 그것이다. 이 흐름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카메라폰이다. 2000년 삼성전자는 국내 최초로 카메라폰을 출시했는데, 슬로건은 ‘바로 찍어서 보낸다’였다. 이 슬로건은 설날 인사에 그대로 적용됐다. 사진이나 영상을 첨부파일한 장문메시지(MMS)가 사람들에게 신선한 반응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영상통화 휴대전화가 등장한 후에는 서로 얼굴을 보며 안부를 주고받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직장인 70% 모바일 연하장 보내
설날 인사의 패러다임이 획기적으로 바뀐 건 2009년이다. 스마트폰 열풍이 불면서다. 스마트폰•QR코드(이차원 바코드)를 활용한 모바일 연하장이 인기를 끌고 있다. 2011년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종이 연하장의 발송이 줄어드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과 서비스를 이용해 새해 인사를 전하는 일은 이제 익숙하다. 설 인사를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올리면 모두에게 뜬다. 일일이 문자메시지를 보낼 필요도 없다.
현금을 인출해 세뱃돈을 주는 대신 스마트폰을 이용해 모바일 상품권을 선물하는 것도 스마트시대의 설날 풍속이다. 스마트폰 가입자 3000만명 시대, 스마트시대의 설날은 간소화되고 지능화되고 있다. 그러나 ‘정’이 사라진 건 아쉽다. 늘 그렇지만 디지털보단 아날로그가 정감이 가지 않는가.
김건희 기자 kkh4792l@thescoop.co.kr | @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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