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 대학을 6개월 만에 자퇴한 청년이 있다. 스티브 잡스다. 학력은 대학 중퇴다. 엄밀하게 말하면 고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듯 사랑하는 일을 찾아라.” 스티브 잡스가 남긴 명언이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철학을 전공했다. 정작 흥미를 보인 건 철학이 아니었다. 캠퍼스의 게시판과 벤치에 새겨진 ‘서체’였다. 그는 전공 대신 흥미를 선택했다. 1년간 학교 근처를 배회하며 타이포그래피 수업을 청강했다. 10년 후 애플을 차렸다. 흥미로 들었던 서체 수업은 매킨토시의 타이포그래피 개발의 원동력이 됐다. 잡스는 대학 문턱을 제대로 밟아보지 않았지만 혁신의 아이콘이 됐다.
학벌의 울타리를 과감히 걷어찬 젊은이는 또 있다. 마크 주커버그다. 대학 중퇴는 그의 당돌한 장난에서 비롯됐다. 주커버그는 학교 전산시스템을 해킹해 학생들의 기록을 빼냈다. 여학생들의 외모를 비교하는 웹사이트 페이스매시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5000명이 몰려들었다.
평범한 학력의 평사원이 CEO로
다음날 학교 측이 웹사이트를 차단하면서 소동은 마무리됐지만 그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초기 형태의 사이트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주커버그가 대학과 영영 이별하는 계기가 됐다. 대학을 중퇴하고 본격적인 비즈니스의 세계로 뛰어든 것이다.
대학 졸업장보다 창의성을 중시하는 글로벌 IT업계에서 이런 사례는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고등학생 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램 광이었던 빌게이츠는 대학을 중퇴하고 마이크로소프트(MS)를 창업했고, 컴퓨터에 푹 빠진 마이클 델은 대학을 자퇴하고 단 1000달러로 PC 리미티드를 세웠다. 트위터를 창업한 잭 도시는 어렵게 편입한 대학을 그만뒀다. 소셜 뉴스 웹사이트 디그를 창업한 케빈 로스는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지만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해 학교를 나왔다.

대한민국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최근 ITㆍ전자업계의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이들의 학력은 지금까지의 판도와는 크게 다르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능력이 있으면 CEO 자리에 오르는 이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학력타파 풍토가 조성되고 있다는 얘기다.
LG그룹은 올 11월 28일 임원인사에서 고졸 성공스토리를 만들어냈다. 주인공은 조성진 사장. LG전자 내 첫 고졸 출신 사장이다. LG그룹에서도 첫번째 고졸 CEO다. 그는 세탁기ㆍ냉장고 등 LG전자의 HA사업부문장을 총괄한다.
조성진 사장은 학창시절 우등생이었다. 서울 용산공고를 졸업한 그는 재학시절 내내 장학금을 탔다. 머리만 좋았던 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장학금을 타면서 공부한 용산공고의 한 동창생은 “착실하게 학교생활에 임했다”며 “장학금도 놓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성실하고 학식까지 갖춘 인재라면 기업이 놓칠 리 없다. 조 사장은 졸업하기도 전에 산학우수 장학생으로 금성사(LG전자 전신)에 입사했다. 1976년 9월,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금성사 세탁기 설계 엔지니어로 출발해 줄곧 세탁기와 함께한 그는 LG전자에서도 알아주는 ‘세탁기 1인자’로 성장했다. 부사장 시절 연구원과 세탁기를 놓고 밤을 새워가며 ‘회담’을 펼친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책임연구원은 20년 넘게 세탁기만 연구한 베테랑이었다. 하지만 고교 졸업 후 30년 넘게 세탁기를 들여다본 조 사장의 식견에 혀를 내둘렀다.

이 기발한 아이디어는 스팀세탁기가 탄생하는데 한몫 톡톡히 했다. LG전자는 오랜 연구개발(R&D) 끝에 2005년 스팀트롬을 출시했다. ‘365일 세탁기 연구에 매진한다’는 조 사장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스팀세탁기는 시장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탄력을 받은 LG전자는 세탁기 세계시장 1위로 우뚝 섰다.
조 사장의 무기는 한결같은 노력과 탁월한 능력이었다. LG전자는 2006년 현장 근로자 출신의 그를 부사장으로 발탁했다. 상무에 오른 지 만 2년 만의 승진, 파격적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6년 후 다시 역사를 썼다. 세탁기 부문 세계 1등을 견인한 공로를 인정받아 올 11월 고졸 출신 CEO가 된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인재 많은 조직은 성장 빨라
삼성전자는 2009년 12월 정기인사에서 그를 사장으로 발탁했다. 신종균 사장의 승진은 ‘실력만 갖추면 학벌은 중요하지 않다’는 삼성의 인재상을 잘 보여준 인사다. 신 사장은 광운대(전자공학과)를 졸업하기 전엔 전문대(인하공전 전자공학과)를 다녔다. 학벌과 관계없이 평사원에서 삼성그룹의 최고부서인 무선사업부 사장에 오른 선례를 만든 것이다. 지금도 그는 삼성전자의 휴대전화와 카메라사업을 이끌고 있다.
고졸로 입사해 25년 만에 임원으로 발탁된 인물도 있다. 김주년 삼성전자 상무는 지난해 12월 인사에서 신상필벌 원칙의 주인공이 됐다. 유저인터페이스(UI)•아몰레드 디스플레이 등 신기술을 적용한 제품 출시에 기여한 공로로 기업의 꽃이라는 임원에 올랐다.
학벌사회는 한국사회의 부정적인 그늘이었다. 학력만 중시하느라 정작 중요한 내면을 간과하는 우를 범했다. 인재가 많은 조직은 성장이 빨라질 수밖에 없다. 특히 요즘처럼 창의력이 필요한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최근 불고 있는 고졸 채용 바람이 반가운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사회에도 학벌이 아닌 능력으로 인재를 평가하는 길이 열렸다. 국내 ITㆍ전자업계가 포문을 열었다. 머지않아 잡스, 주커버그를 능가하는 인재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김건희 기자 kkh4792@thescoop.co.kr | @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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