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감 많아야 하루 5건 IMF보다 추운 겨울
일감 많아야 하루 5건 IMF보다 추운 겨울
  • 김건희 기자
  • 호수 18
  • 승인 2012.11.16 23: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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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없는 수선가게 주인의 ‘한숨’

▲ 43년간 이대 앞을 지킨 황씨는 이대 수선골목의 산증인이다. 최근 5년 사이에 이대 상권이 기울면서 이대 수선골목도 타격을 받고 있다.
외환위기 때 오히려 호황을 누린 사업이 있다. 다시 쓸 수 있게 고쳐주는 ‘수선업’이다. 하지만 이것도 옛말이 됐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수선업계도 불황이다. 똑같이 어려운데 지금이 더 힘든 까닭은 뭘까.

“불황엔 수선이 최선’이란 말도 옛말입니다. 40년 넘게 이대에서 수선가게를 운영했는데 이렇게 손님이 없기는 처음입니다.”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수선골목의 33㎡(약 10평) 남짓한 수선가게. 이대 앞에서 황연복(59•여)씨는 43년 동안 자리를 지켰다. 황씨는 홀로 ‘신세대명품수선’이라는 수선가게를 운영한다. 따로 직원을 둘 여유가 없어서다. 가끔 일손이 부족할 때 도와주러 나오는 친한 언니가 있지만 요즘은 부를 일이 없다.

기자가 가게를 찾은 10월 29일, 황씨는 오전 11시 다 돼서 가게 문을 열었다. 이날 오후 3시까지 황씨가 받은 손님은 3명. 첫 손님은 가봉된 원피스를 확인하러 왔고, 둘째, 셋째 손님은 코트 소매길이와 바지 허리 수선을 맡겼다. 이날 오후까지 황씨 손에 들어온 돈은 3만5000원이 전부. 전날도 황씨는 하루종일 청바지와 씨름하고서야 고작 3만원을 손에 쥐었다. 맞춤옷을 전문으로 하는 황씨의 수선가게 하루 일감은 대략 4~5건. 그것도 길이수선 같은 단순수선을 포함해서다. 그중 단순수선이 절반을 차지한다.

황씨의 시름은 깊어만 간다. 매년 10월이면 본격적으로 일거리가 많아지기 마련인데 올해는 신통치 않다. 수선가게는 통상 9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성수기고, 3월부터 9월까지는 비수기다. 여름엔 옷이 가벼워 수선이 들어와도 돈이 되지 않는다. 결국 6개월 장사인 셈이다. 그런데 10월에 일거리가 없으니 황씨로서는 당황스럽다.

비수기 내내 황씨가 버는 돈은 생활비 수준이다. 가게 월세 65만원을 내고, 교통비를 쓰고, 반찬거리를 사면 남는 게 없다. 그래도 황씨는 비수기니까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올해 10월 같은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돈을 벌어야 하는 시기인데도 일거리가 없다. 황씨는 수선가게를 덮친 불황의 그늘을 실감한다.

이상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수선업은 경기가 나쁠수록 호황을 누린다. 외환위기(IMF)가 터진 1997년에도 그랬다. 사람들이 평소 같으면 못 입겠다고 버리던 것을 고쳐서 입겠다고 가져왔다. “외환위기가 터지고 나서 사람들이 전부 옷을 고쳐 입었어요. 너도나도 ‘아나바다’(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자) 운동에 참여할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불황엔 수선이 최선’이란 말도 이제는 옛말이 됐다. 2008년 금융위기를 겪은 후부터 수선도 불황이다. 똑같이 어려웠는데 지금이 더 힘든 까닭은 뭘까.

▲ 외환위기일 때 오히려 호황을 누렸던 수선업이 최근 중저가 원단을 사용한 SPA 브랜드와 복합쇼핑몰의 공세로 불황을 겪고 있다. 황씨는 "'불황엔 수선이 최선'이란 말도 이제는 옛말이 됐다"고 말했다.
중저가 의류 공세에 수선율 ‘뚝’
무엇보다 의류업계의 트렌드가 바뀐 게 골목상인의 목을 타게 만들고 있다. 최근 들어 중저가 원단을 쓴 의류 브랜드가 등장했다. 이를테면 SPA(제조•의류 일괄의류) 브랜드다. 의류 제조업체가 판매까지 본격 나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최신 유행의 옷을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수선가게 입장에선 SPA 브랜드가 얄밉다. 수선은 원단이 좋을 때 빛이 난다. 원단이 안 좋은 옷을 수선하면 도통 티가 나지 않는다. “SPA 브랜드가 유행하면서 손님은 원단이 좋은지 안 좋은지 잘 모르고 옷을 삽니다. 옷을 입다가 수선하겠다고 가져오는데 수선비가 생각보다 많이 드는 거죠. 이 돈이면 새 옷을 사는데 하고 생각을 바꿔요.”

최근 황씨의 수선가게에는 맡기고 찾아가지 않는 옷이 늘었다. 그런 옷은 중저가 원단을 쓴 게 많다. 일단 수선하겠다고 옷을 맡기고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비경제적인 생각이 든다. 수선비 2만~3만원을 내느니 웃돈을 얹어서 새 옷을 사는 게 경제적이다. 결국 황씨는 수고의 대가를 지불받지 못한다. 다른 작업을 제쳐두고 수선을 했는데 옷을 안 찾아가면 매출을 잡아먹는 요인이 된다.

 
대학가 상권이 ‘대형화’된 것도 황씨에겐 곤혹스럽다. 황씨는 16살 때 수선업에 뛰어들었다. 언니의 형부가 양장점에서 일을 해보라고 권유한 게 계기였다. 나이는 어렸지만 눈썰미가 좋고 부지런했다. 1968년, 황씨는 이대 양장점에 취직했다. 심부름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일을 빨리 배워 금세 자리를 잡았다. 지금의 가게를 36살에 냈다. 43년간 이대 앞을 지킨 황씨는 이대 수선골목의 산증인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이대 앞에 양장점과 의상실이 대거 형성됐다.

이대 수선가게에 불황이 닥친 건 최근 5년 사이의 일이다. 2008년을 기점으로 이대 상권이 기울었다. 당시 이대 상권은 10대•20대 중심의 소비문화였다. 여대 특성에 따라 보세의류 옷가게와 미용실•분식집이 주를 이뤘다.

그런데 인터넷 쇼핑몰이 등장하면서 이대 상권이 크게 흔들렸다. 보세의류와 액세서리 업종이 매출에 타격을 입었다. 여대란 프리미엄을 누렸던 미용실도 시내 곳곳에 체임점이 들어서면서 위축됐다. 먹자골목을 이룰 만큼 많던 분식집도 프랜차이즈 분식점 등장으로 손님을 다 잃었다. 이런 와중에 이대역 2번 출구에 들어선 ‘이대 yes APM’은 상권 몰락을 초래했다. 큰 건물이 들어서면 상권이 부활할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복합쇼핑몰에 자리를 내준 지역상인만 보금자리를 잃었다. 분식이 주를 이루던 먹자골목이 한순간 사라지면서 사람들이 머무는 시간도 줄었다. 이대 상권은 갈수록 휑해졌다. 덩달아 수선가게에 몰리던 사람들도 줄어들었다.

 
복합쇼핑몰 등장에 기술자 흔들
황씨가 운영하는 ‘신세대명품수선’ 바로 옆 이레수선도 열흘 전 가게를 내놨다. 복합쇼핑몰의 등장이 수선골목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신세대명품수선’은 황씨의 인생 결과물이다. 수선 기술자로서 적지 않은 성과를 이뤘지만 황씨는 요즘 노후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다. 황씨의 올해 나이는 59세. 내년이면 예순이다. 수선은 계속할 수 있지만 구차한 것 같아 싫다. 나이를 먹으면 아랫사람에게 잔소리만 할 것 같아서다. 돈도 예전만큼 벌지 못한다. 이젠 임대료를 내는 것도 버겁다. 가게를 열어놓는 게 손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황씨는 ‘100세 시대’라는 말을 들으면 무서워진다. 이제 뭘 하면 좋을까. 황씨가 자신의 수선가게 간판에 새겨진 ‘장인’ 글자를 오래도록 올려다봤다. 손님은 들어오지 않았다. 
 

김건희 기자 kkh4792@thescoop.co.k | @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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