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길이 고송성高松城을 물에 잠기게 하고
수길이 고송성高松城을 물에 잠기게 하고
  • 이남석 더스쿠프 대표
  • 호수 15
  • 승인 2012.10.28 14: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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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8회

수길은 답하되 “영토는 이제 사국과 구주를 다 차지한 다음 수륙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가서 조선과 명을 칠 것이니 아직 작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신장은 수길의 엄청난 대답에 껄껄 웃어버리고 말았다.

 
직전신장이 목하수길로 선봉을 삼아 월전으로 출병하여 2800급을 베고 강북江北의 거족인 천정장정을 멸하여 월전 일대를 평정하였다. 신장이 수길로 소곡小谷(고다니) 성주를 삼고 20만석의 영토를 준 뒤에 수길의 성을 또 고쳐 우시수길羽柴秀吉(하시바 히데요시)이라 하였다.

장군 족리의소가 축출을 당한 뒤로 승군을 다시 일으켰다. 직전신장은 군사 육만을 몰고 가서 승군 수만을 대파하였다. 다음해 봄에 경도의 대관들을 상국사相國寺(쇼코쿠지)로 불러들여 전승한 축하를 성대히 거행하였다. 갑주의 무전신현의 아들 무전승뢰武田勝頼(다케다 가쓰요리)는 아비의 원수를 갚으려고 갑주에서 출병하여 신장의 방어선 역할을 하고 있는 덕천가강을 친다.

▲ 오사카성 내 박물관에 전시된 풍신수길과 덕천가강의 미니어처로 표현된 전투장면.
가강이 직전신장에게 원조를 청하여 왔다. 신장이 군사 5만을 보내어 무전승뢰의 군사 만여명을 도살하였다. 산현삼랑山縣三郞(야마가타 사부로)1)은 갑주의 명장이었다. 신장의 자객이 삼랑의 오른팔을 조총으로 쏘아 맞추니 삼랑이 쓰러지지 아니하고 왼손으로 오른손에 들었던 기를 집어 가지고 군사를 지휘한다. 자객이 다시 그 왼팔을 총으로 쏘니 삼랑이 입으로 기를 물고 지휘하여 최후까지 대항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삼랑은 무전신현의 제자로 그 병법을 신현에게 배웠다.

갑주를 점령한 뒤에 신장은 종2위 우대신右大臣의 직위를 받았다. 신장은 본원사 싸움터에 불교와 반대되는 천주각天主閣을 높이 지어 기독교를 신봉하니 일본의 기독교가 이 시대부터 유행하였다.
장군 족리의소는 멀리 망명하여 관서의 모리씨에게 의탁하여 월후의 상삼겸신을 선동하여 각처의 제후들의 응원을 청하게 하고 송영씨와 일규에 가담한 승군의 잔당을 규합하니 그 세력이 관서로 집중되었다.

직전신장이 이것을 염려하여 수길을 정서대장征西大將으로 삼아 군사 삼만을 주어 관서로 출정케 하고 자기의 넷째아들 수승秀勝(히데카쓰)을 수길의 양자로 정하여 주고 수길에게 “자네는 양자에게 장래 영토를 얼마나 물려줄 것인가?” 하고 웃으며 물었다.

이는 수길이 아직 아들이 없는 까닭이었다. 수길은 답하되 “영토는 이제 사국과 구주를 다 차지한 다음 수륙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가서 조선과 명을 칠 것이니 아직 작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신장은 수길의 엄청난 대답에 껄껄 웃어버리고 말았다. 수길이 정서군을 이끌고 관서로 내려가 승군을 쳐 대파하고 섭진攝津(셋쓰)의 수령 황목촌중荒木村重(아라키 무라시게)과 비탄飛彈(히다)의 수령 영목중행鈴木重行(스즈키 시게유키)을 쳐 3년의 지구전이 되었다.

직전신장은 희로姬路(히메지) 일대에 성을 쌓아 정서군의 근거지를 만든 뒤에 수길이 고송高松(다카마쓰)성을 포위하였다.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이하 일곱 곳에서 원군이 들어와 수길에 대항한다. 수길은 용왕龍王(류오)산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고 수공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고송성의 수공은 수길의 일생에 가장 흥미 있는 싸움이었다. 수길의 병법은 역전力戰보다는 지전智戰의 비결을 쓰며 지리와 기후관계를 이용하여 군사력 이상으로 천지 대자연의 힘을 이용한 일이 많았다.수길이 고송성의 수평선을 측량하고 용왕산 고원지대에 진을 옮겨 치고 성 밖으로부터 물길을 파서 성 밑으로 들어가니 이 공역을 마치면 5월 장마철이 된다는 것이었다. 수길의 군사는 공사를 힘쓰는데 모리휘원毛利輝元(모리 데루모토)은 5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송성을 구원코자 하여 오다가 연일 장마비가 와서 중로에서 지체하여 가며 겨우 고송 땅에 내도하였다.

그러나 고송성은 벌써 수중에 잠겨서 성내의 집의 지붕은 개구리 세상이 되고 말았다. 모리휘원의 대군은 원괘猿掛(사루카케)산에 유진하고 고송성의 침수된 광경만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수길은 고송성을 물속에 파묻고 원괘산의 모리휘원의 군대와 싸우면서 돌연히 직전신장에게 청원하였다.

머리로 싸우는 수길

 
수길은 병력이 넉넉히 모리씨와 싸울 만하다. 그러면서도 굳이 청원하는 이유는 모리씨를 두려워함이 아니다. 관서 일대를 혼자 평정하면 신장의 부하들이 그 공을 시기할 뿐 아니라 신장까지도 꺼려할 것 같다. 그러기에 그 전공을 신장과 나누자는 주도한 계획에서 나온 것이었다.직전신장은 수길의 급보를 받고 자기의 아들 직전신충織田信忠(오다 노부타다)으로 총대장을 삼고 명지광수 세천충흥細川忠興(호소카와 다다오키) 등 다섯 장군을 선봉을 삼고 자기는 경도로 들어와 본능사本能寺(혼노지)에서 밤을 지내더니 청지기 삼란환森蘭丸(모리 란마루)이 쫓아 들어와 “명지광수가 반역했습니다!” 외치고 창을 들고 앞을 서서 나가고 근시近侍 170여인도 놀라 일어섰다.

삼란환은 10인의 용맹을 합한 역사였다. 신장은 활을 들고 앉았다가 명지광수의 선봉이 들어오는 대로 쏘더니 화살이 떨어져서 칼을 들고 앉았는데 명지광수의 날랜 장수 안전병위安田兵衛(야스다 효에)2)가 신장의 앞에 나타나서 창을 던졌다.이러는 동안에 명지광수의 군사가 신장의 근시 300여인을 죽였다. 삼란환이 신장의 앞에서 안전병위와 격투를 할 때 신장은 그만 자결하였다. 직전신장의 최후 향년은 49세였다.3) 명지광수는 반기를 들어 신장의 부하를 도살하였다. 총대장 직전신충도 할복자살하고 말았다.

광수가 배반한 원인은, 직전신장이 본원사에 방화하여 승군 300여 명을 태워버리는 참혹한 일을 저지르고 정서군을 일으켜 황목촌중의 일족 800여 명을 학살하는 등 신장의 포악 잔혹한 행동을 명지광수는 심히 증오하였기 때문이다. 신장은 부하를 초개와 같이 대우하는 성질로서 당시에 호걸이란 사람도 아이와 같이 여기는 까닭에 부하들은 신장의 군선4)으로 뺨을 맞는 일은 예사로 당하였다.

광수는 반심을 품었다. 금번 기회에 족리 장군의 집을 중흥한다고 명분을 내세워 모리휘원의 내응을 받아 신장을 기습 살해한 것이었다. 용왕산에 있던 우시수길은 변란의 소식을 듣고 곧 회군하여 명지광수를 토벌하는데, 광수는 경도에서 모리휘원의 군사를 부르고 각처 제후에게 응원을 청하였으나 수길의 신속한 용병에 광수는 일전에 대패하여 승룡사勝龍寺(쇼류지)로 달아났다.

수길은 숨 쉴 여가도 없이 또 야습으로 풍우 몰 듯하였다. 명지광수는 또 산속으로 달아나 시종의 칼을 빌려 할복하여 죽었다. 종자들도 순사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었다. 명지광수의 삼일천하가 평정되니 직전씨의 집 사속嗣續 문제가 일어나 기부성으로 유신遺臣들이 모여들었다. 시전승가는 직전신장의 차남 직전신효織田信孝(노부타카)5)를 세우자고 주장하고, 수길은 맏손자인 삼법사三法師(산보시)6)를 세우자고 주장한다.

시전승가의 주장은 이미 장자 신충이 죽었으니 이러한 분란한 시국에 장성한 차자 신효를 세우는 것이 인격주의라고 하였다.수길의 주장은 종통주의라는 것이다. 다른 유신들은 직전씨의 집 원로인 시전승가의 주장에 끌렸다. 수길이 밖으로 나와 단우오랑丹羽五郞(니와 고로)7)을 불러 회의장에 들여보냈다. 단우오랑이 하는 말이 “지금 수길의 주장이 이 상황에 당연하오. 전 주인 신장공이 생존하였을 때 적자의 부인이 태기가 있음을 아시고 만일에 생남하면 내 집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 말씀이 이 집에서 다 같이 들었은 즉, 적손을 세우는 것이 곧 전 주인공의 유언을 받아 실행하는 길일 것이오!”라고 설명하는 통에 시전승가도 전 주인공의 유언이란 말에는 머리가 수그러졌다.

수길이 다시 들어와 적손을 세우기로 정식 발표하여 유신들이 다시는 입을 못 열게 한 뒤 적손인 삼법사를 세웠다. 시전승가는 광수를 칠 때도 수길에 뒤지고, 사속문제도 수길의 주장에 밀려서 뒤졌다 하여 분하고 억울하였다. 직전씨의 집 새 주인은 겨우 두 살 되는 유아였다. 수길이 어린 주군을 품에 안고 전각 위에 앉아서 유신들의 하례를 받은 다음에 그 유산을 분배하여 공평하게 제신들에게 갈라주었다. 제신들은 각기 본령으로, 수길은 희로로 돌아갔다.

엄동설한에 적진 정면 돌파
유신들이 전 주인 신장의 망령을 위안하는 법회를 시야柴野(시바노) 대덕사大德寺(다이토쿠지)에서 거행하자는 통문을 돌렸다. 수길은 답하되 “대장군 주인공의 망령을 위안할 법회를 어찌 남의 절을 빌려서 하리요? 새로 큰 서원을 세우고 명장의 손으로 공의 우상을 새겨 앉히고 그 상 앞에서 법회를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하였다. 그래서 경도에 터를 잡아 총견원總見院(소켄인)이라는 사당을 이룩하고 신장의 목상을 앉힌 뒤에 법회 일자를 택하여 각처 유신에게 통지하였다.

법회 날짜가 임박하여 시전승가는 3000기를 인솔하고 그 밖의 유신들도 군위를 차려가지고 혹 1000기 적어야 수백기를 거느리고 들어오는데 수길은 오지를 않았다. 법회 전날에 소문을 들으니 수길이 3만기를 거느리고 들어온다고 하여 유신들은 놀랐다. 시전승가도 의혹이 나서 자기의 신변이 위태할까 염려하여 법회 참석도 그만두고 야간에 달아나버렸다. 다른 유신들도 많이 달아나버렸다.

수길은 법회 날 아침에 경도에 들어와서 유주를 품에 안고 총견원으로 왔다. 전 주인 직전신장의 초상 앞에서 법회를 거행하니 3만기의 군용이 정숙하여 일월을 희롱하였다. 이후로 신장의 뒷일은 수길이 혼자 맡아 하게 되었다. 직전신장의 일생 사업이 모두 수길의 앞길을 닦아준 데 지나지 못한 셈이었다. 전 주인의 영령 앞에서 법회 참석까지도 못하게 된 시전승가는 원로로서는 낯이 깎이는 일이라 하여 수길을 절치 증오하였다.

곧 군사를 일으켜 수길을 치려고 별렀으나 월전국은 북방이라 겨울이면 눈 때문에 길이 막히는 까닭에 행군할 수가 없으므로 중지하고 있었다. 시전승가가 수길을 치려한다는 것은 수길도 잘 알고 있다. 내년 봄이면 승가가 출병할 것을 짐작한 수길은 남에게 기선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엄동에도 불구하고 5만 군사를 일으켜 강주의 장빈長浜(나가하마)으로 쳐들어간다.

장빈을 지키던 시전승가의 장수는 수길을 대적할 수 없이 되어 항복하였다. 당시에 병법이 귀신같다는 시전승가도 연전연패하였다. 수길은 승승 진격하여 성 아래 천주각 앞까지 쫓아 들어갔을 때 시전승가는 불맞은 맹호의 모양이 되어 전일의 영명이 쓸 곳 없이 되었다. 승가는 그 처와 함께 자결하였다. 승가의 근시들은 주인 부부가 죽은 뒤 200여 명의 무사와 함께 천주각 타는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수길이 월전 일대를 평정하고 기부로 들어가 직전신효를 축출하고 돌아와 근거지를 대판에 정하여 6만 인부를 사역케 하고 28개국의 목석을 운반하여 와 3년 동안에 대판에 내외성을 쌓아 두르니 주위가 60리다.
성내에는 화려한 누각이 즐비하게 지었는데 한복판에 천주각을 높이 쌓아 올려 천주각에서 사면을 둘러보면 경도 부근의 복견伏見(후시미)과 조우鳥羽(도바) 지방에서 흘러내리는 정천淀川(요도가와)의 강물이 성을 돌아나가고 바다에서 강으로 들어오는 돛배는 성 밖에 몰려든다.

멀리 보이는 산맥은 대화大和(다이와)와 하내河內(가와치) 지방으로부터 쫓아와서 병풍 치듯 한 건 이 대판성의 장관이었다. 참으로 난공불락의 성곽이요 사통팔달의 관문 도시였다. 직전신장의 아들 직전신웅織田信雄(오다 노부카쓰)이 덕천가강을 찾아와서 수길의 행동이 자기에게 대하여 너무도 냉박함을 호소한다.

가강은 신웅에게 동정하여 의병을 일으켜 수길의 죄를 성토하는 격문을 천하에 공포하고 직전신웅과 덕천가강이 두패를 갈라 쳐들어가며 견산犬山(이누야마)성을 공락하고 소목小牧(고마키) 산성을 점거하였다.
수길의 선봉은 나가는 대로 싸움에 지고 사방 제후는 직전신웅을 응원하여 의기를 들고 일어난다.

수길은 제후의 연합군을 대항하기가 불리하다고 생각하고 신웅에게 강화하기를 청하였다. 신웅은 수길의 자신을 낮추는 말과 후한 예물에 그만 마음이 풀어져서 강화를 허락하여 버렸다. 직전신웅이 금번에 수길을 치러 나선 것은 수길이 자기 집의 천신으로 자기 집 일에 대하여 너무나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 괘씸한 데 지나지 못한 일이었다. 이미 수길이 굴복하는 데야 더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시전矢田(야다)에서 수길을 만나는데 신웅은 마상에 앉았을 때에 수길은 말에서 내려 배례하는 것이 자기 부친 때 하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직전신웅이 수길에게로 돌아서니 신웅을 이용하여 패업을 꿈꾸던 덕천가강은 품었던 용의 구슬과 알을 수길에게 빼앗긴 셈이 되어서 섭섭하기가 짝이 없이 되어 그만 회군하여 버렸다. 수길은 가강에게 사자를 보내어 우리 두 사람이 전일보다 더 친절히 지내자고 하고 가강의 아들 하나를 수길의 양자로 달라고 조른다. 가강은 수길의 비위를 거스를 수가 없어 12세 되는 아들을 보냈다. 수길은 그 양자의 이름을 수강秀康(히데야스)이라 지었다. 수길과 가강 두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었다. 그런즉 아이 성명은 우시수강羽柴秀康(하시바 히데야스)8)이었다. 각별히 총애 양육하였다.

천황의 황실인 궁내부宮內府에서는 족리장군의 집이 망한 뒤로 직전신장을 믿고 있었던 것이 신장이 죽고 나니 지금은 황실을 호위할만한 인물이 수길이라 하여 종4위 우근위소장右近衛少將으로 봉직하였다.
 

▲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운이 편리한 우에마치 대지에 천하 쟁탈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 성을 축성하기로 한다. 이것이 도요토미의 오사카성이다.
조정에서는 차차로 승품시켜 종2위 대납언代納言으로 정2위 내대신內大臣으로 올려오다가 금번에는 종1위 관백關白이 되었다. 이 관백이란 벼슬은 천황의 밑에서 모든 업무를 총찰하는 즉 승상대장군丞相大將軍이란 직위였다. 황실에서 또 우시수길의 성을 고쳐 풍신豊臣(도요토미)이라는 성을 하사하였다. 풍신수길이 관백의 자리에 올라앉은 뒤로 당시에 조총을 사용하는 기주紀州(기슈)9)의 근래根来(네고로)씨를 토벌하고, 사국의 장종아부씨를 항복 받고, 월중越中(엣츄)10)의 좌좌성정佐佐成政(삿사 나리마사)을 굴복시키고 하였다.

풍신수길은 덕천가강을 경도로 불렀다. 가강은 곧 명에 따라 경도로 올라와 수길을 찾아보는데 관백에게 배알하는 예로 보았다. 그날 밤에 풍신수길이 미복으로 가강의 숙소에 찾아와서 인사 끝에 수길이 “내가 미천한 사람으로 천하제후에게 존대를 받게 된 것은 미안한 일이지마는 천하를 통일하자면 이 지위를 아니 가지고는 아니 되겠으니 귀하는 내 뒤를 거들어 주오” 하고 가강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끊는다.

가강은 수길의 활달한 도량에 탄복하여 전하, 전하 부르며 심복이 되고 말았다. 풍신수길은 덕천가강을 회유하여 굴복시킨 뒤로 다시 관팔주와 오우奥羽(오우)11)와 구주를 토벌하려 하여 먼저 구주로 출병하였다. 구주에서는 도진씨의 집이 제일 강하다. 도진의구島津義久(시마즈 요시히사)와 도진의홍島津義弘(시마즈 요시히로) 두 형제였다. 수길의 군사가 좌우로 갈라 흑전효고黑田孝高(구로다 요시타카)는 풍전豊前(부젠)12)으로, 장종아부원친은 풍후豊後(분고)13)로 쳐들어 가다가 그중 장종아부원친은 참패를 당하였다.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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