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유명 자산운용사에서 근무하는 펀드매니저 김형진(가명)씨는 문자 한통을 받고 화들짝 놀랐다. 내용은 이랬다. “A기업의 회계감사 결과, 의견거절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김씨는 A기업의 주식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문자를 보낸 사람은 친분관계가 두터운 한 애널리스트였다. 김씨는 이 정보가 공시되기 전 서둘러서 주식전량을 처분해 15억의 손실을 피했다.

매수의견 일색인 투자의견 보고서
최근 애널리스트가 펀드 매니저에게 미공개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논문이 발표됐다. 엄윤성 한성대(경영학부) 교수는 최근 증권학회지에 게재한 「애널리스트 투자의견 하향에 대한 공매도거래 분석」이라는 논문에서 “코스닥 시장에서 공매도 거래자(기관투자자)가 애널리스트의 투자의견 하향일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공매도空賣渡란 말 그대로 ‘없는 주식을 파는’ 것이다. 가령 주가가 2만원인 A종목을 보유하지 않은 B씨가 이 종목의 주가하락을 예상하고 매도주문을 낸다. 주가가 2만원이기 때문에 일단 그 값에 판다. 결제일은 3일 후다. 그 기간 주가가 1만원까지 떨어졌다면 B씨는 1만원에 주식을 사서 결제한다. 주당 1만원의 시세차익을 얻는 셈이다.
공매도는 주가하락을 정확하게 예상하면 많은 시세차익을 낼 수 있다. 하지만 주가가 되레 상승하면 공매도한 투자자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공매도의 성패를 좌우하는 건 주가하락을 예상할 수 있느냐라는 얘기다. 그런 측면에서 “공매도 거래자가 애널리스트의 투자의견 ‘하향일’을 정확하게 예측했다”는 엄 교수의 주장은 충격적이다.
엄 교수는 2009년 6월부터 2011년 5월 31일까지 제조업 기업을 대상으로 애널리스트 투자의견 하향 전후 기관투자자의 공매도 거래를 분석했다. 그 결과 투자의견 하락일 3일 전과 당일에 비정상적인 공매도량이 크게 늘어났다. 특히 코스닥 종목의 경우 비정상 공매도의 증가량이 54%에 달했다. 유가증권시장의 비정상공매도량은 14% 증가했다.
엄 교수는 “코스닥시장에서 애널리스트의 투자의견 하향 정보와 공매도거래자의 거래 사이에 밀월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고 주장했다. 기관투자자들이 애널리스트의 투자의견 하향 정보를 미리 넘겨받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애널리스트의 정보유출 없이 거래자가 투자의견 발표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공매도 거래량을 늘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애널리스트와 펀드 매니저의 유착관계는 투자의견 보고서 대부분이 매수의견 일색이라는 데서도 유추할 수 있다.

증권사의 보고서는 경기나 기업의 미래수익과는 무관하게 1년 내내 온통 빨간색이었다는 얘기다. 애널리스트가 주로 매수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기관과 리서치센터가 갑을甲乙관계에 있어서다. 리서치센터가 생산하는 정보의 주요 수요층은 기관이다. 이런 이유로 애널리스트 입장에서 기관이 보유한 종목에 부정적 투자의견을 제시하기 어렵다.
한 애널리스트는 “부정적인 투자의견을 제시하면 기관이나 해당 기업에서 압박이 들어온다”며 “애널리스트의 특성상 기관이나 해당 기업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매도의견을 내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고 말했다.
애널리스트가 펀드 매니저와 유착관계를 맺는 것은 불법이다. ‘증권거래법’은 기관투자가와 일반투자자 사이에 정보 격차가 없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도 기업과 계약관계에 있는 자가 미공개 정보를 외부에 누설해 특정 종목의 거래를 유도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제174조 1항).
하지만 업계에서는 애널리스트와 펀드 매니저의 유착관계가 관행처럼 굳어진지 오래라고 말한다. 애널리스트가 기업탐방을 다녀온 직후나 보고서를 내기 전 알고 지내는 펀드 매니저에게 관련 정보를 슬쩍 흘려주는 것은 새로울 게 없다는 반응까지 나온다.
한 증권사 리서치센터의 관계자는 “요즘 애널리스트는 업계 분석보다 펀드 매니저에게 잘 보이는 데 더 관심이 많다”며 “정보제공은 물론 펀드 매니저에게 식사나 술, 골프 접대를 하는 애널리스트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염불 보단 잿밥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는 얘기다.

애널리스트와 펀드 매니저의 관계를 ‘통계’로 분석한 엄 교수의 논문이 화제를 끌었음에도 금융감독당국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엄 교수는 “공매도 거래량이 급증한 투자기관이 어디인지 알려달라는 전화가 한 번 걸려왔을 뿐”이라고 밝혔다.
금융당국이 단속을 강화한다고 해도 애널리스트와 펀드 매니저의 유착이 근절될지는 미지수다. 미공개 정보제공자와 수익자의 연관성을 규명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애널리스트가 펀드 매니저에게 제공하는 정보가 불공정 거래 행위에 속하는지도 일일이 따져봐야 한다.
눈 감은 금융감독당국 개미만 피눈물
엄 교수는 “불공정거래 행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미공개정보의 범위를 어디까지 볼 것인가에 대한 논란도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 규제당국이 시장의 공정성을 지켜줘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있다”며 “개미들이 기관투자자에 비해 정보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애널리스트와 펀드 매니저의 유착으로 피해를 보는 쪽은 개미들이다. 개미들이 기업현장을 방문하거나 자체 경영 분석을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들이 증권사 정보에 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들이 취하는 증권사 정보는 기관에서 뽑아먹고 남은 뒷북 보고서다. 그렇다. 증시의 속설처럼 ‘개미는 기관의 총알받이’다. 증권업계의 불편한 자화상이다.
심하용 기자 stone @ thescoop.co.kr | @ 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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