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유연화라고 쓰고 비정규직이라 읽는다
노동의 유연화라고 쓰고 비정규직이라 읽는다
  • 더스쿠프
  • 호수 12
  • 승인 2012.09.25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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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가 만든 불편한 진실

▲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열린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4.30 투쟁결의대회에서 참석자들이 비정규직 철폐를 주장하고 있다.
출판업계 종사자들이 공동으로 아픈 일, 서러운 일을 쏟아내는 익명의 트위터 계정 ‘출판사 옆 대나무숲’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업종을 가리지 않고 온갖 대나무숲 공동 계정이 등장했다. 대나무숲은 왜 자꾸 늘어만 가는 걸까.

사방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외침이 들려온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트위터에서 최근 유행하고 있는 ‘xx옆 대나무숲’ 계정 얘기다. 불합리한 처우와 자부심을 가질 수 없는 환경, 그리고 불안한 미래를 담은 내용이 대부분이다. 너무 현실적이어서 업계를 모르는 사람이 읽으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들릴만한 메가톤급 폭로도 많다.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폭로에 대한 욕망은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는 일이다. 고대 페르시아에서는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의 신체비밀인 큰 귀를 이발사가 이름 모를 들판에 버려진 우물 속에 대고 폭로했다. 신라시대 경문왕의 ‘당나귀 귀’는 왕관을 만들던 장인이 도림사 뒤편 대나무 숲에다 풀어놨다. 하지만 대나무숲이 바람에 흔들리며 비밀은 세상으로 퍼진다.

폭로에 대한 강한 욕망의 근원까지 알 필요도 없다. 우리는 결과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 익명 트위터 계정을 처음 보면 말장난에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한 시간을 내리 읽다 보면 저절로 언팔로우(트위터 구독을 끊는 일) 버튼을 누르게 된다.

누구나 겪는 일은 개인의 영역이 아닌 시스템의 문제라는 점을 새삼 깨닫기 때문이다. 그나마 사표 대신 언팔로우 버튼에 손을 대는 게 현명하다. 우리는 이런 반복적인 괴로움을 미니홈피나 트위터 등에서 지속적으로 표출하다가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한 이들의 이름을 지금이라도 줄줄이 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 사회를 ‘대나무숲’ 없이는 참기 힘든 극단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일까. 왜 우리는 이런 극단의 시대를 살게 됐을까. 왜 우리는 OECD 국가 중 압도적으로 1위인 자살률로 사실상의 자살대국이 된 것일까.

신라 경문왕 시대는 온갖 역병과 지진, 홍수와 같은 천재지변은 물론이고 반역까지 곧잘 출몰하던 어지러운 시기였다.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은 자국에서는 영웅이었지만 피정복민에게는 자국의 주권을 빼앗은 원수다. 당시 서민들의 정신상태는 황폐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올 10월 한국인의 머릿속에는 ‘불황’이라는 단어 하나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불황이라는 단어에서 구조조정과 실직, 가계경제의 파탄과 해체를 연상한다. 반복된 역사가 알려준 공식이다. ‘IMF 시대’라는 어지러웠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인 IMF의 ‘대한민국 경제’ 공식 치세기간은 4년이다. 그 기간 한국 정부는 금융정책은 물론이고 산업•노동정책까지 모든 것을 바꿔야 했다. ‘노동의 유연성’이라고 쓰고 ‘비정규직’이라고 읽는 노동정책, ‘구조조정’이라고 쓰고 ‘해고’라고 읽는 산업정책도 모두 IMF 통치기간 동안 생겨난 개념들이다. 15년이 흐른 지금 다시 불황이라는 바람이 불자, 온갖 대나무숲에서 곡哭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이한석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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