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자는 격물치지格物致知라, 보통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항상 먼저 아는 법이 있으니 조선에서 선경지명先見之明이 있는 이가 그 몇 사람이던가.
이순신의 나이 사십오세가 되던 기축1589년 2월에 전라감사 이광李珖이 순신을 특별히 불러 행수군관1)을 삼았다. 순신이 부임하니 이광이 대우하기를 후히 하고 탄식하되 그대 같은 영재로 이와 같이 떠돌아다님이 탄식할 일이라 하고 곧 천거하여 전라도 조방장2)을 겸임케 하였다. 이광은 그 당시에 문무재라는 명망이 있는 사람이다.
순신이 조방장으로 순행巡行하여 순천부에 이르니 부사 권준權俊이 순신을 영접하고 음주 대작하는 사이에 순신이 권세를 얻지 못함을 애석히 여겨 “순천은 큰 고을이니 귀하 같은 영준으로 내 자리를 대신하여 순천부사가 되는 것이 좋겠소” 하고 자기의 지위를 자부한다. 순신은 아무 대답이 없이 다만 미소할 따름이었다. 이는 권준의 실언함을 일소에 붙이고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해 11월에 무겸선전관3)을 맡게 되어 상경한 적이 있었는데 불과 얼마 안 되어 다음 달 12월에 전라도 정읍井邑현감4)에 발령되었다. 순신이 무변으로 출사出仕한지 15년이나 되었으되 다만 하급 관직에만 다녀서 변방 풍진에 초라할 뿐이다가 이제 겨우 작은 고을의 수령이 되었다. 이때에 우국하는 지사들은 순신 같은 영준으로 그 운세가 이와 같이 어려움을 한탄하여 마지않았다.
그 뒤에 태인泰仁현감5)을 겸임하여 그 고을에 도임하였다. 태인 고을에 현감이 오래 비어서 백성들의 소송이며 기타 공사公事가 산같이 밀려 있었다. 순신이 붓을 잡아 일일이 처결하여 잠깐 사이에 모두 처리하였다.
백성들이 관청 뜰에 모여 원님의 수완과 처사가 민첩하고도 공정함을 보고 탄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어떤 사람은 어사御使에게 장계를 올려 이순신으로 하여금 태인현감에 전임시켜 달라고 청원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하였다.

역시 안부 묻는 답서를 하였더니 그 뒤에 조대중이 역적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에 걸려 감옥에 갇히고 그 가택을 수색하여 갔는데 순신이 이때 마침 전라도 차사원6)으로 상경하는 중에 우연히 금오랑7)을 만났다.
그는 본래부터 순신과 친분이 있었다. 순신더러 말하되 “금번 조대중의 가택을 수색하는 중에 그대의 서간이 압수되었으나 내 그대를 위하여 그 서간을 빼어 버리려 하오” 하였다.
순신은 답하되 “조대중이 내게 전일에 편지하였기에 내 답서하였으나 다만 서로 안부를 물을 따름이요 아무 다른 말이 없었고, 이제 이미 나라 일로 압수된 서류를 사사로이 빼어 버림은 마음에 편치 아니한 일이오” 하였다. 금오랑이 순신의 정대한 마음을 탄복하였다. 그 뒤에 선조가 순신의 서간을 그 서류 중에서 보고 그 글의 뜻과 글씨가 모두 우수함을 보고 항상 심중에 이순신 세 글자가 각인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순신이 그길로 서울에 올라와 각 마을에 일을 보는 중에 우의정 정언신이 역시 정여립의 옥사에 관계되어 옥중에 갇혀 있었다. 전년 함경도에 재직할 때에 그 휘하에 있었던 고로8) 순신이 감옥에 찾아가 문안하였다. 이때에 금오랑들이 당상에 모아 앉아 술잔을 주고받고 풍악으로 질탕히 논다.
순신이 금오랑들을 대하여 “유죄 무죄를 떠나 일국 대신이 옥중에 있는데 그대들이 풍악으로써 그 가까운 당상에서 연주하니 조정 명분을 본다면 어찌 미안치 아니하겠소” 하였다. 금오랑들이 이 말을 듣고 참괴하여 사과하고 자리를 파하여버렸다.[역적의 연루자라 하면 사람마다 멀리 피한다. 그러나 공은 피하지 않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순신의 두 형이 모두 일찍 별세하고 그 자녀를 돌보아 기름이 자기의 친자녀보다 더하여 그 혼사를 형의 자녀를 먼저 한 뒤에 자기 자녀의 혼인을 의논하였다. 아직도 결혼 못한 어린 조카가 많아 대부인 변씨가 거두어 주고 있었다. 순신이 수령으로 부임할 때에 그 대부인을 모시고 모든 조카들을 거느려 임지인 정읍으로 내려간다.
혹자는 비평하되 순신이 소읍 수령으로 딸린 식구들을 남솔9)함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순신이 이 말을 듣고 탄식하며 “내가 비록 남솔하였다는 비난을 들을지언정 차마 의탁할 곳이 없는 두 형의 아이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순신의 동기간의 정이 매우 돈독함을 감탄해 마지않았다.
경인1590년 7월에 조정에서 이순신으로 고사리진10) 병마첨사11)를 제수하여 장차 국가의 장성을 시킬 변방 이력을 밟게 하였다. 간관諫官들이 다투어 말하기를 “수령을 너무 자주 옮긴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전임되지 못하고, 또 8월에 정삼품 당상관으로 올려12) 만포진13) 수군첨사를 임명하였더니 또 대간臺諫들이 “너무 급히 벼슬을 올린다”고 탄핵하므로 부임하지 못하고 그냥 정읍현감으로 머물러 있었다.

신묘1591년 2월에 이순신으로 진도珍島군수를 임명하였다가 미처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진 수군첨사를 제수하였다.
이는 조정에서 장차 크게 쓰고자 하여 현감에서 군수로, 군수에서 첨사로 순서를 밟아서 승차함이었다. 가리포에 도임하지도 못하고 같은 해 2월 13일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순신이 이때까지 변경과 소읍으로 돌며 봉황이 가시나무 숲에 깃들임 같더니 이제야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당시에 선조가 비변사에 대신들을 모아놓고 시국에 비추어 대장이 될 만한 현재賢材를 각기 천거하라고 하였다. 이에 응하여 우의정 유성룡은 이순신과 권율 두 사람을 추천하고 판부사14) 정탁은 이순신과 곽재우와 김덕령 삼인을 추천하고 영부사15) 정철은 이억기와 신립과 김시민을 추천하였다. 그리되어 그 당일에 추천된 이는 합 칠인이었다.
이순신 - 우의정 유성룡과 판부사 정탁의 천거
권율 - 우의정 유성룡의 천거
곽재우 - 판부사 정탁의 천거
김덕령 - 판부사 정탁의 천거
이억기 - 영부사 정철의 천거
신립 - 영부사 정철의 천거
김시민 - 영부사 정철의 천거
우의정 유성룡이 국가의 장래사를 우려하여 또다시 이순신을 역천하여 기어이 전라좌수사에 임명되게 하였다. 순신이 정읍으로부터 좌수영이 있는 여수麗水에 부임하였다.16)

이순신이 좌수사로 처음 도임할 때에 순신과 절친한 벗 한사람이 꿈을 꾸었다. 아주 큰 나무가 있어 구름까지 닿은 듯하고 그 가지와 잎이 대단히 무성하여 우주간에 가득하였는데 그 가지와 잎에는 수천만이나 되는 우리 조선 사람이 올라앉았다.
그런데 땅에서는 홍수가 넘쳐나서 그 큰 나무가 쓰러지려 할 즈음에 큰 장사壯士가 와서 그 나무를 붙들어 자빠지지 아니하게 한다. 자세히 본즉 그 큰 장사는 곧 이순신이었다. 그 꿈을 깨어서 이상하게 여겼더니 후인들은 그 꿈을 옛날 송나라 문천상文天祥이 하늘을 떠받치던 꿈에 견주었다.
새로 도임한 수사 이순신은 일본에서 출병하여 우리 조선을 침범할 것을 미리 알았다. 때마침 삼사일간이나 계속하여 동풍이 크게 분 뒤에 난데없는 배 만드는 나무 조각과 톱밥이 바다를 덮어 표류되어 물결을 따라와서 남해안 일대의 물가에 밀려들었다.
순신이 이것을 조사한 뒤에 짐작하기를 풍신수길이 일본 전토 육십여주를 통일한 뒤에 그 여세를 몰고 대해를 건너와서 난을 일으키려 하여 필시 병선을 크게 건조함이라 하여 해변 거민으로 포로가 되어 일본에 다년간 거주하였던 공대원孔大元이란 사람을 불러들여 일본국 사정과 그들의 군제軍制의 강약과 병기의 종별을 철저히 안 연후에 공대원을 군중의 서기를 시켜 두고 제승방략制勝方略을 연구하였다.[공대원은 이대원이 전사할 때에 포로가 되었다.]

수사 이순신은 본영과 더불어 소속 5읍 6진17)의 병기와 군량이며 장졸의 체격과 건강이며 군사의 충실 여부를 일일이 검열하여 착착 정비하고 한편으로 각지의 철공鐵工들을 불러모아 순신이 친히 지도 감독하여 철삭鐵索을 뽑아내어 각처의 해협 요소마다 가로질러 막되 양쪽에 기계를 설비하여 만일에 적선이 오거든 철삭을 감아올려서 그 통행을 차단하되 밀물과 썰물 때에 급한 물살을 이용하여 적선을 전복시킬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 배의 왕래에는 방해가 없게 하기 위하여 평상시에는 양쪽에 장치한 기계를 풀어서 그 철삭을 도로 물 밑에 잠기게 하였다. 또 바다의 벌흙과 아궁이의 흙을 구워 염초焰硝 수천 근을 제조하고 버드나무 숯과 메밀짚을 태운 재와 유황을 합제하여 화약을 많이 제조하고 채철採鐵군관을 파견하여 철광과 동광을 경영 채굴하게 하였다.

그동안의 좌수영 병선이란 것은 대맹선大猛船이 2척이요 중맹선中猛船이 6척이요 소맹선小猛船이 2척이요 무군소맹선無軍小猛船이 7척이어서 합 17척이었다. 명색만은 갖추어 있다하나 반 정도는 못쓰게 되었고 배의 몸체라든지 부속품이 되는 노와 닻과 키와 돛 등이 모두 실제 사용에는 경쾌하지 못한 점이 많았던 것이었다.

새 수사 이순신은 엄밀히 검열하여 쓸 것 못 쓸 것을 분간하여 해군과 군함의 개혁안을 세웠다. 관하 5읍 6진 내의 이름난 장인들을 총출동시켜 대소 전선을 전부 새롭게 만들기로 하고 설계도를 작성하여 조선造船 공사에 착수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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