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대희 性 코너]

전쟁에 의해서 포로로 잡은 적국의 민간인들이 생겼을 경우라야 자기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의 속살을 만지고 또한 혼외정사 같은 솜사탕 맛이 나는 달콤한 섹스를 즐길 수 있는 실로 빈곤한 삶의 시대였다.
그러나 각국이 소형 도시국가의 형태로 태생하여 그것들이 정벌되는 과정에서 섹스의 파트너는 차츰 확대되어 갔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무사들에게는 성욕의 충족이 무엇보다 중요한 해결책으로 제시되어야 할 과제였으며, 그들은 이웃 부족과의 전쟁에서 전쟁 미망인과 그들의 딸을 나포하여 비교적 달콤한 섹스를 즐길 수 있었다.
전쟁에서 전공戰功을 치하받게 되었을 때 식량과 더불어 성교의 기쁨을 맛보며 살도록 부하 장병들에게 배분해주는 제도가 있었다. 그 부상副賞을 노리고 병사들은 목숨을 내던지고 싸웠다.
다행히 승전하여 젊은 여자와 약간의 봉토封土를 하사받는 수도 있으나, 패전으로 자식과 아내를 빼앗기는 불행도 감수할 수 밖에는 없었다. 유럽 사회나 중국대륙도 이런 식의 약탈적 혼인이 비일비재했다.
인류의 발달과정을 살펴보면, 남의 아내를 빼앗고 또한 내 동반자를 강탈당하는 비극적 생활이 거의 10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지금처럼 법원의 부부관계 보호를 받지 못해서 부인를 얻지 못한 무사武士들은 근친상간이라는 비상수단으로 분출하는 욕구를 진정시켜 나갔다. 그 다음으로 다가온 1000년 동안은 남색이 유일한 성욕처리 수단이었다.
이처럼 인간사人間事의 심층을 파고들면 이상한 성애가 자연스럽게 개발되었으며 실제로 그런 방법으로 불만스럽게 생활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중세의 기독교 사회에서는 자식을 출산하여 후대를 이어가는 생식행위로서의 성을 제외하고, 정욕을 가지고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간음姦淫이라 하여 섹스에서 쾌락을 배제해 왔다.
여성을 악惡과 유혹의 근원이라고 보는 사상에 의해서, 극력교회極力敎會의 권력을 개개의 가정 내부에까지 간섭해 들어갈 수 있도록 아주 특별한 권력을 부여했다.
바꾸어 말하면, 개인의 내면과 신체를 제도적으로 구속했다고 말해도 괜찮을 정도로 시시콜콜 간섭했다.
이런 부당한 교회의 사생활 간섭에서 성욕이 왕성한 사람들은, 기독교 문화를 기저基底로 해서 그런 제도에 항거하는, 反카톨릭문화가 태동했다.
지금까지의 카톨릭 문화에 반하는 새로운 종교문화가 태동되었는데, 그것은 종교개혁이었다. 그 저변에는 인간의 본능에 상반相反해서 발생하는 종교측의 부당한 요구의 철폐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자기 아내와 성행위를 가능한 즐겁게 하는 성행위 기술의 금지도 거부하고, 그 밖의 금지된 애로스들도 용인하는 신시대가 오게 되었다. 이런 종교개혁은 섹스가 하늘이 준 유일한 쾌락이며 행복의 든든한 뿌리라는 새로운 해석으로 우리들 인간의 삶을 고무시켰다.
자기 아내라고 하더라도 생식을 목표로 하는 러브 섹스인 경우 간음이라고 하여, 남편 이외의 사내를 지정해두고 남편의 양해 아래 여성에게 생식 욕구가 생겼을 경우, 대리 남편으로 등록한 사내와 완전한 나신裸身으로 포옹하고, 즐거운 스킨십을 만들기 위해서 극진히 애무하는 것은 교회가 용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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