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왜 보호를 못 받았나
73세 아파트 경비원 허모씨. 수년간 일했어도 근로계약서는 쓴 적이 없다. 작업을 할 때는 제대로 장비를 지급받지도 못했다. 결국 그는 안전장비 없이 정화조 청소 도중 바닥이 붕괴되면서 질식사했다. 산업재해다. 하지만 책임을 질 만한 사람이 없다. 왜일까.
하지만 고용노동부가 별도 조사를 시작한 후 이 사고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게 드러났다. 허모씨의 사인은 익사가 아닌 유독가스에 의한 질식사였기 때문이다. 방독마스크 같은 안전장비만 갖췄더라도 운명이 달라질 수 있었다는 얘기다. 허모씨는 작업 전에 안전장비를 지급받지 못했다. 명백한 산업재해였고, 유족들은 피고용인의 과실 책임을 묻겠다고 나섰다.
피고용인은 H아파트 입주자대표회(회장)였다. 팔순을 바라보는 입주자대표회 회장은 장례식에 참석해 유족들에게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나름의 사정을 이해해 달라”면서 합의를 요구했다. 내용은 대략 이랬다. “경비원 고용 비용을 줄이기 위해 용역업체를 통하지 않고 허모씨를 고용했다. 입주민들이 많은 관리비를 낼 수 없으니 차선책을 택한 거다. 고용관계가 성립되면서 다양한 법적 책임이 따라 오는지 이번에 알았다. 죄송하다.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합의금을 마련하도록 하겠다.”
당연히 고용관계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근로계약서는 단 한번도 쓴 적이 없었고, 급여는 전액 현금으로 지급했다(근로기준법 위반). 경비업무에서부터 정화조 청소까지 거의 모든 허드렛일을 지시하기도 했다(경비업법 위반). 작업을 지시하면서 안전장비를 지급하지도 않았다(산업안전보건법 위반).
그럼에도 유족 측은 그 책임을 다 묻지 않았다. 몇번의 조율을 거쳐 유족 측과 입주자대표회 회장이 합의는 약 2000만원에서 마무리됐다. 유족 측이 비교적 쉽게 합의를 해준 셈이다. 유족 관계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직접 고용은 불법 투성이
“사실 오물에 빠져 돌아가신 걸 생각하면 화가 치민다. 하지만 나름대로 알아보니 용역업체가 아닌 입주자대표회를 상대로 한 소송은 쉽지 않다더라. 누가 피고용인이었는지 따져야 하는데, 과연 회장이 아파트 대표로서 면접을 본 것만 갖고 피고용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입주민 전체에 책임이 분산되면 소송을 해도 별로 소득도 없다고 하더라. 게다가 같은 동네에 살아서 아파트 입주민들이 큰돈을 내놓을 수 없는 처지라는 것도 잘 안다. 별 수 없는 선택을 한 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첫째 이유는 법적 공백이다. 근로기준법, 산업안전보건법 등 관련법은 대부분 노동자가 고용돼 있는 업체를 규제한다. 하지만 입주자대표회는 업체도 아니고, 전권을 쥐고 업무를 지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업체에 버금가는 법을 적용하기 힘들 수밖에 없다. 소송을 할 수는 있지만 까다롭기 짝이 없다는 거다.
고도 법무법인의 이용환 변호사는 “사실 입주민들의 직접 고용에 법적 하자는 없다”면서 “피고용인이 누구인지를 면밀히 따져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규명이 힘든 만큼 소송 자체가 힘들어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변호사는 “입주자대표회 회장이 허모씨에게 정화조 청소 작업지시를 하면서 동의를 구했는지도 따져봐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누가 마다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현실적으로 취할 수 있는 조치들이 없어서 피해자나 유족 입장에선 억울한 측면이 많을 것 같다”고 지적했다.
용역업체 비용 지원하는 것도 방법
노 변호사는 “직접 고용을 못하도록 강제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려면 누군가 비용적인 면을 지원해야 할 것 같다”면서 “최근 입주민들이 직접 고용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 같은데, 허모씨 사망사고와 같은 안타까운 일이 또 일어날까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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