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아버지날 없는 이유

한국은 원래 5월 8일이 ‘어머니날’이었는데 1973년에 ‘어버이날’로 바꾸었습니다. 이 땅의 ‘날개 잃은’ 아버지들은 기념일조차 어머니에게 꼽사리 낀다고 생각하니 입맛이 영 개운치 않습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고, 6일은 현충일이어서 일까요. 문득 국립묘지인 대전 현충원에 잠들어 계시는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3년 전 경황없이 떠나보내고, 쫓기듯 사느라 아버지를 추억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생사의 고비를 넘긴 대가로 받은 화랑무공훈장을 세상 떠나는 날까지 자신의 분신처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보통 한국 남성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아내인 어머니에게 의존하다보니 사별 이후 삶의 질이 형편없이 낮아졌다는 겁니다. 아버지보다 4년 가까이 먼저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요리사이고, 대변인이고, 집사였습니다. 홀로 남은 아버지는 마치 적막강산에 혼자 남겨진 듯 했습니다. 아버지와 자식들은 서로 걱정은 하면서도 할 얘기가 많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아버지가 전화라도 걸어오면 대뜸 “뭔 일 있으세요?”라며 놀란 듯 응대하기도 했을 정도이니까요.
어머니가 계신 천국으로 떠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아버지에게 어느날 치매라는 불청객이 찾아왔습니다. 외로움에 사무쳐 차라리 모든 것을 잊는 게 좋다고 생각하셨는지 모릅니다. 아버지가 겪었을 외로움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해 드린 점이 지금에 와서는 회한으로 다가옵니다.
이 나라에 아버지의 날이 없는 이유는 남자들이 자초한 것은 아닐까요.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아침 일찍 나가서 늦은 밤에 들어오다 보니 아이들과 얘기할 기회조차 별로 없습니다. 생존경쟁의 정글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가족에게는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지요. 게다가 나이 든 남자는 가슴 속으로만 눈물을 흘릴 뿐 남과 터놓고 대화하기를 두려워합니다.
인간관계가 주로 업무와 연결되다 보니 은퇴하면 자연히 관계가 소원해지고, 새로운 친구를 만들기도 녹록지 않아집니다. 집안 주변을 맴돌게 되고, 작은 일에도 곧잘 서운해하며 상처를 받습니다. 가족들은 달라진 남편이나 아버지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나이든 남자는 늘 외로워하는지 모릅니다.
흔히 노후대책을 생각하면 은퇴자금 마련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하워드S.프리드먼, 레실리R.마틴은 1500명의 인생을 80년간 추적한 사상 초유의 수명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한 「나는 몇살까지 살까」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이 책에는 ‘살을 빼라’ ‘담배를 끊어라’ ‘운동을 열심히 해라’와 같은 흔해 빠진 조언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저자들은 ‘눈이 번쩍 뜨일’ 놀라운 사실을 밝혀냅니다. 남자든 여자든 남성적인 사람들은 남녀 모두 사망위험이 증가한 반면 여성적인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건강을 잘 유지했다는 겁니다.
정약용ㆍ이황 같은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여성형 리더십의 소유자였습니다. 가족 위에 군림하는 호랑이 같은 아버지가 아니라 귀양을 가서도 절절한 편지로 집안의 소소한 일까지 챙기고 자식들을 훈육했습니다. 자식의 고뿔까지 걱정할 정도로 가족 간의 소통을 중시하고, 식구들이 불행해질까 가슴 졸이며 살았습니다. 21세기 아버지가 가야 할 길은 바로 ‘엄마 같은 아빠’인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기억하며 마음 아파하면서도 아버지의 뒷길을 따르는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전율하고 있습니다. 1세대(30년) 이상 길어진 수명을 눈앞에 둔 우리는 새로운 노후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힘든 부양자 역할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가족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집안에서 어슬렁거리지 말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야 합니다. 가족과 대화하고, 보살피고, 함께 어울리는 역할을 남자들이 되찾아 오자는 겁니다. 아버지를 통해 깨우친 노후대책은 바로 어머니 같은 아버지가 되자는 것이지요. 그래야 ‘아버지의 날’이 저절로 생겨나지 않을까요.
윤영걸 더스쿠프 편집인 yunyeong0909@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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