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곡성 ❹
영화 ‘곡성’은 일견一見 악령(선善)과 퇴마사(선善)의 이분법적 대결구도를 설정한 듯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흥미롭게도 과연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분명하게 그리지도 않고 결론을 내려주지도 않는다. 선악 구도와 권선징악의 스토리 라인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보기에 따라서는 무척 무책임하고 불친절하다.

베테랑 무당 일광(황정민), 출신과 행색이 수상쩍은 외지인(쿠니무라 준), 그리고 귀신인지 사람인지 조차 애매한 여인 무명(천우희) 중에서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모호하다. 분별할 수 없는 선과 악 사이에서 나약한 인간 종구(곽도원)은 두려움 속에서 끝없이 의심하며 방황한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약한 인간 종구는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을 믿는 실증주의자이다가도 또 한순간 실체가 없는 영靈을 믿는 영지주의자, 신비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악령으로 의심받는 외지인은 누가복음까지 패러디해가며 예수님처럼 자신이 뼈와 살이 있는 ‘실재’임을 증명해 보이지만 종구는 믿지 못한다. 무명이 너무도 완벽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역시 확신하지 못하고 무당 일광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을 쫓아주기를 청원한다.
그러나 일광이 귀신을 쫓는 굿판을 벌이는 동안 딸이 금방이라도 죽을 듯이 고통스러워하자 종구는 굿판을 뒤엎고 일광을 내친다. 눈에 보이는 것도 믿지 못하고 눈에 안 보이는 것도 믿지 못하고 방황한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판단을 못하고 공황상태에 빠진다. 외지인, 무명, 일광 모두 자신들이 ‘진리’라고 속삭인다.
유대인들의 성경이라고 할 수 있는 ‘토라(Torah)’는 “Shi'ma Yisrael(들으라 이스라엘아)”이라는 무척이나 강렬한 두마디로 시작한다. 인간의 비극은 이브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게 보이는’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시작되었다고 믿는 유대인들은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말고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고 따르기를 가르친다.
모든 인간은 진리의 말씀을 듣고 따르고 싶다. 그러나 세상에 선과 진리의 말씀이 하나만 존재한다면 나약한 인간이 방황하지 않으련만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서로 다른 ‘진리의 말씀’들이 너무나 많아 모두 영화 속 종구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정신분열상태에 빠지고 비극으로 치닫는다.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질 뿐”이라는 프랑스 여류작가 시몬느 드 보봐르(Simone de Beauvo ir)의 말처럼 선과 악도 태생적이고 고정적인 속성은 아닐 것이다. 선이나 악으로 만들어지고 규정될 뿐이다. 선과 악은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인간들이 선택하고 만들어나가는 것일 뿐이다. 세상 어느 것이라도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을 뿐이다. 일광이 악마일 수도 있고 외지인이 악마일 수도 있다. 악마를 규정하는 것은 오직 ‘인간 종구’의 입장과 마음, 그리고 선택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니체(Nietzsche)는 선과 악, 그리고 진리라는 것의 본질에 대한 존경할 만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이 세상에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서로 다른 진리들이 존재할 뿐이다.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들은 단지 자신들의 믿음을 진리로 만들고 싶은 ‘진리의지(will to truth)’에 불과할 뿐이다.”
오늘도 광장에서 상반되는 선과 악의 주장들이 거칠게 부딪친다. 우리는 각자의 서로 다른 주장들을 정말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자신의 주장을 절대유일의 진리로 만들고 싶은 ‘진리의지’에 충만해있을 뿐일까.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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