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부산행 ❷

‘좀비(Zombie)라는 말은 카리브해의 섬나라 아이티(Haiti)에서 기원한다. 아이티는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신대륙으로 팔려오거나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노예 후예들이 세운 국가다.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가난과 질병에 시달려왔다. 길거리는 항상 시체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이 넘쳐났다. 아직 죽지 못하고 숨이 붙어있는 참혹한 형상의 사람들은 사실 죽었던 나의 가족이나 사랑했던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온 것이라는 ‘기담奇談’이 성행했다고 한다. 아마도 거리에 버려진 끔찍한 형상의 가엾은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안아주고 거둬주자는 안타까운 마음들이 모아진 기담인 듯하다.
좀비는 ‘죽지 않은 자(undead)’이며, 살아있지만 산 것도 아니며, 사람이지만 사람도 아닌 존재다. 영화 속에서 KTX 역사와 객실을 온몸에 피떡칠을 하고 쓰나미처럼 덮치는 좀비들은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이다. 사람의 형상을 한 ‘악령惡靈’일 뿐이다.
좀비의 공포는 이들이 지닌 ‘집단성’과 ‘무차별성’에서 비롯된다. 좀비 한두사람(?)쯤이라면 보통사람 허벅지만한 팔뚝을 자랑하는 상화(마동석)의 전투력으로 능히 때려잡고 물리칠 수 있다. 그러나 쓰나미와 같이 몰려드는 좀비집단은 상화도 감당불능이다. 또한 좀비 떼는 상대를 가려지 않는다. 좀비 아닌 인간은 모두 무차별 공격 대상이 된다. 자신들과 같은 좀비로 만들어야 비로소 공격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최근 대통령을 옹위하는 4%에게 대통령을 비판하는 96%와 광화문을 뒤덮은 촛불은 분명 좀비 떼의 쓰나미일 것이다. ‘부산행’ KTX의 석우(공유)와 상화(마동석)처럼 ‘우리끼리’ 똘똘 뭉쳐 태극기 휘날리며 격파해야 한다. ‘우리’ 아닌 좀비 떼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가는 것 같아 두렵다. 좀비 떼는 균질적이어서 차별화되거나 구별되지도 않는다. 좀비는 좀비일 뿐 ‘괜찮은 좀비’이거나 ‘덜한 좀비’도 없다. 좀비는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인 공포와 타도의 대상이다. 빨갱이는 빨갱이일 뿐 ‘괜찮은 빨갱이’나 ‘용서할 만한 빨갱이’를 굳이 가려낼 필요도 없고 방법도 없다. 야구선수 영국(최우식)은 절친한 동료가 좀비가 된 순간 가차 없이 야구방망이로 짓이긴다.
끔찍한 좀비는 사실은 죽지 못하고 살아 돌아온 나의 가족,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좀비의 본고장 아이티 사람들의 깊은 마음을 헤아려본다.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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