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인 김소영(가명ㆍ32)씨는 매달 꼬박꼬박 20만원씩 연금보험료를 납입한다. 벌써 8년째다. 이제 그에게 20만원은 애초부터 없는 돈이나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없는 돈 취급(?)을 하는 게 쉬웠던 건 아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노후준비도 함께 시작한 그는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20만원씩을 그렇게 매달 모아왔다. 훗날 노후자금 마련 부담을 덜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때때로 돈 몇 푼이 아쉬울 때는 20만원 생각이 간절하기도 했다. ‘왜 먼 미래 때문에 지금 당장 불편한 것을 감수해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든 적도 많다. 하지만 그때마다 김씨는 두 눈 딱 감고 다짐했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한 푼이라도 모아놔야 한다.” 김씨는 여전히 미래를 위해 현재의 여유를 포기하는 게 맞는지 확신이 없다. 그래도 12년 만기를 채울 때까지는 계속 없는 돈 취급을 해볼 생각이다. 지금보다 그때 더 행복해질 거란 무모한 믿음 하나로 말이다.
우리나라의 ‘경제행복지수’가 2011년 하반기 이후 최저로 떨어졌다. ‘경제행복지수’는 현대경제연구원이 전국의 20세 이상 경제활동인구를 대상으로 매년 6월과 12월에 실시하는 조사다. 개인이 경제적 요인에 어느 정도 만족을 느끼는지를 평가하는 잣대다. ‘경제적 안정’ ‘경제적 우위’ ‘경제적 발전’ ‘경제적 평등’ ‘경제적 불안’ 등 5개 항목을 100점 만점으로 매긴다. 100점에 가까울수록 행복하고 0점에 가까울수록 불행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7년 첫 조사 이래 경제행복지수는 한 번도 절반 수준인 50점을 넘지 못했다.
소폭으로 등락을 반복하던 경제행복지수는 지난해 하반기 반짝 상승(44.6점)했다. 조사 이래 가장 높은 점수였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정부의 개별소비세 인하, 추경 집행,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 행사 등 소비활성화 대책에 힘입어 경제행복지수가 상승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경기침체와 저성장 기조로 상승세는 그때뿐이었다. 올 상반기 경제행복지수는 다시 38.9점까지 뚝 떨어졌다.

경제적 행복의 장애물로 ‘노후준비 부족’이라고 답하는 비율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2014년 12월 같은 조사에선 응답률이 24.8%였다. 그런데 2015년 12월엔 같은 대답을 한 이들이 28.8%로 늘었고, 올 6월엔 다시 34.1%로 훌쩍 뛰었다.
자영업자(47.8%)나 주부(43.0%)의 응답비율이 가장 높은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기를 누구보다 직접적으로 느끼는 이들의 응답률이 높다는 것은 경기침체로 소득이 줄어 노후준비를 제대로 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얇아진 지갑, 노후준비 어려워
은퇴가 시작되는 50대와 60대의 응답률이 높은 것도 문제다. 지난해 12월 조사 기준, 20대의 14.5%와 30대의 19.4%가 ‘노후준비 부족’을 경제적 행복의 장애물로 꼽은 반면 40대 이후 응답률은 급격하게 상승했다. 40대는 26.3%, 50대는 35.6%, 60대 이상은 60.2%가 노후준비 부족 때문에 경제적으로 행복하지 않다고 답했다.
고가영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2000년대 이후 경제ㆍ사회적인 환경이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 고령층의 노후준비가 부족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기대여명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부동산 경기에 구조적인 변화가 오는 등 고령층이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등장했다”면서 “이런 변수 때문에 당시 저축할 시기를 놓친 것”이라고 설명했다.

부족한 노후준비는 소비성향 저조 외에도 ‘노인빈곤’이라는 사회적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경제적인 여력이 없으면서 마음 한편에 늘 노후준비라는 숙제를 안고 있는 이유다.
우리나라 노인빈곤율은 2006년부터 지속적으로 증가세다. 지난 2013년에는 경제협력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인 49.6%를 기록하기도 했다. OECD 가입입국의 전체 평균인 12.1%의 4배를 넘는 수치다. 김유빈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노인빈곤율 증가는 은퇴 이후 고령층의 소득분포가 크게 악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결국 노후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낮은 소득 때문에 노인빈곤에 빠질 수 있다는 거다.
그렇지만 알면서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바로 노후준비다.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알 수 있다. 취업포털 잡코리아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들이 희망하는 기대수명은 평균 84.1세다. 체감 퇴직연령이 50.9세인 것을 감안하면 정년퇴직 이후의 약 30년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여기에 정년 이후 한 달에 평균 185만원의 생활비가 필요하다(잡코리아 ‘정년 이후 예상하는 생활비’ 설문조사 결과). 하지만 늘어나는 기대수명, 한 달 평균 필요한 생활비를 알면서도 노후자금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은 정작 절반에도 못 미쳤다. 당장 경제적 여유가 없어 노후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그 이유다.

노인 빈곤으로 고령층 소비 위축
‘노후자금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는 응답자는 절반(61.4%)을 넘었다. 그렇다면 직장인들은 왜 노후의 경제적 문제를 걱정하면서도 노후자금을 준비하지 않는 걸까.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77.2%)’다. ‘과도한 자녀 양육비 지출(10.3%)’도 노후준비를 막는 요인인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현재의 생활도 버거워 노후를 준비할 만한 여력이 없다고 답한 것이다.
김동열 현대경제연구원 정책조사실장은 “우리 사회가 고령화 사회에 돌입한 만큼 정부 차원에서 다양한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고령자들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밀집형 공공임대아파트를 지원하거나 고령친화적인 일자리 창출과 노후소득을 높이기 위한 정부 지원이 그것이다. 개인을 넘어 정부 차원의 노후준비가 지금부터라도 시작돼야 한다는 거다.
김미란 더스쿠프 기자 lamer@thescoop.co.kr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