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장졸의 폭행과 약탈은 갈수록 심해졌다. 이들은 군자금이라 하여 날마다 조선 조정에 재물을 내라고 졸랐다. 한번이라도 응하지 못하면 황제에게 아뢰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명나라 졸병들까지도 민가에 무상출입해 부녀를 겁간하고 재물을 빼앗았다.

이 글을 본 대명 신종황제神宗皇帝는 병부상서 형개를 정동총독征東總督으로 삼아 조선에 보내어 삼군을 총독하게 했다. 태자사보太子師保 진린에겐 광동廣東 절강浙江의 수군을, 마귀에겐 선부宣府 대동大同 육군을, 유정에겐 묘병苗兵을, 동일원董一元에겐 한상漢上의 육군을 제독하게 했다. 이렇게 수륙 4제독을 조선에 보낸 것이다.
선조는 경기ㆍ황해ㆍ평안ㆍ함경 제도의 군사 1만여인을 새로 모집하여 명총독 형개, 경략 양호, 제독 마귀 등의 절제를 받게 하고 명병과 합력해 한강의 각 여울목을 지키게 하였다. 양호의 부하 참장 설호신, 유격 진인陳寅의 무리가 남대문 밖 동록東麓에 관성묘關聖廟를 창건하자 조선 조정은 은을 내어 비용을 조달했다.
5월 13일은 관성關聖의 탄일이어서 관성묘에서 제사를 봉행하는데 다들 이렇게 말했다. “오늘 풍우가 있으면 신이 이르심이라 하더니 과연 오후에 뇌우가 크게 떨쳤다.”

약탈 일삼는 명나라 수군
하지만 조선 측이 무기력하게 대할수록 형개ㆍ양호ㆍ마귀 이하 명나라 장졸의 폭행과 약탈은 더욱 심해져서 그칠 바를 몰랐다. 이들은 군자금이라 하여 날마다 조선 조정에 재물을 내라고 졸랐다. 만약 한번이라도 응하지 못하면 이렇게 호령했다. “너희가 재물을 숨기고 군자금을 아니 대니 황제께 아뢰어 죄를 내리게 하겠다. 너희가 그러면 우리는 돌아갈 테니 그리 알라.” 명나라 졸병들까지도 민가에 무상출입해 부녀를 겁간하고 재물을 빼앗았다.
저항하면 때리고 차고 하여서 그들의 눈에는 조선 대신이니 대장이니 양반이니 하는 것도 전연 보이지 아니하였다. 영의정 유성룡은 참다가 못 참아서 이러한 상소를 올렸다.
臣觀支供天兵之事 其間耗失之弊 不可紀極 雖竭國內之力爲之 其勢亦將難支 近自南下以後 遼?宣大之兵 沿途作拏 敺打官民 日以益甚 守令 不能支當 遠避山谷 其汎濫侵突 何所禁止 朝朝暮暮 相繼不絶 牛馬一空 其爲生民之厄 不可忍言 然 他無可救之策 只宜令接伴使李德馨 從便稟呈于提督 出令于管下諸將 庶可少?於萬一 亦未知如何 徒爲憫歎耳

이 무렵, 이순신은 고금도로 남하했다. 명장 양호ㆍ마귀와 권율의 무리가 울산성을 치다가 돌연 한양으로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개하여 삼도 수군 제장을 호령해 보화도의 여막을 걷고 남하, 지금의 고금도에 도착한 거였다.
순신, 후퇴 소식 듣고 분개
이때 전라감사 황신이 이순신의 형세를 보려고 보화도에 있는 진중에 들어왔다. 이순신과 황신은 한산도에서 처음 만나 지기지우가 되었던 사이였다. 서로 병기兵機와 방략을 논의하고 황신은 이순신을 삼남의 해상 장성이라 하여 전라도 연해 19읍을 순신의 관하에 전속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고금도에 근거를 잡고 명장 진린이 남하하면 거처할 관아를 건설할 예정이었다. 고금도는 흥양반도를 돌아 좌수영을 통하는 요해처에 있는 섬이었다. 이 섬은 산이 조밀하고 물이 깊어 형세가 기이하고 큰 농장이 곁에 있어 군량을 농작하여 공급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적군 소탕도 늦추지 않았다. 수하 제장을 강진 해남으로 보내 떠도는 적을 소탕하여 버렸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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