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성의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다. 식수는 끊겼고, 먹을거리는 떨어졌다. 더구나 명병이 에워싸고 있어, 돌진할 틈도 없었다. 일본군 참모총장인 흑전효고는 각처로 통지해 구원병을 불러 울산으로 보냈다. 소조천수추, 모리수원, 흑전장정, 협판안치, 과도직무, 가등가명 등의 무리가 언양, 밀양으로부터 길게 달려 울산으로 합류했다.

성 안에 있는 천야행장, 가등청병위는 기장에 있는 가등청정에게 통지를 하려고 몇번이나 시도했다. 하지만 울산에서 기장까지의 거리가 이틀길이 되는 데다 성 밖에는 명병이 겹겹이 에워싸서 있어 통지를 보낼 방법이 거의 없었다. 천야행장은 기장에 보낼 장사를 물색하여 구하는데 부하장사 목촌뢰무木村賴毋가 자원하고 나서더니 창 한 자루와 말 한 마리로 교묘히 울산성을 빠져나갔다. 그 이후 밤낮 이틀 만에 기장에 도착하였다. 가등청정은 그제야 울산성의 위급한 소식을 듣고 곧 울산으로 가려 하였다. 하지만 가등청정의 부하들은 이렇게 간했다. “울산성을 10만이 넘는 명병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우리의 군사로는 대적하지 못합니다. 차라리 울산성을 버리는 게 낫습니다.”
하지만 가등청정은 이런 주장을 물리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울산성을 지키는 천야행장이 거의 죽게 되었다. 의리상 구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그의 부친인 천야장정淺野長政(아사노 나가마사)이 내게 부탁한 것이 있다. 자신의 아들 천야행장을 잘 봐달라는 거였다. 그런데 내가 그를 구하지 않는다면, 다른 날에 무슨 면목으로 천야장정을 대하겠는가.”

그러던 어느날, 명군에게 포로로 잡혀 있던 일본군 한명이 성 밖에 나타나서 이렇게 외쳤다. “양호가 가등청정에게 강화를 하려 한다. 서로 만나기를 청하니 가등청정은 성 밖에 나와서 100보 거리를 사이에 두고 양호와 만나보라.” 위급한 상황에 처했던 가등청정은 성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천야행장은 “양호의 간계일지 모르니 가벼이 나갈 일이 못 된다”면서 자신이 대신 나가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번엔 천야행장의 부하들이 만류해 화의는 없던 일이 되었다.
상황은 갈수록 급박해졌다. 일본군 참모총장인 흑전효고는 각처로 통지해 구원병을 불러 울산으로 보냈다. 소조천수추, 모리수원, 흑전장정, 협판안치, 과도직무, 가등가명, 봉수하가정, 등당고호의 무리가 언양, 밀양으로부터 길게 달려 울산으로 합류했다. 이렇게 울산으로 모여든 군사가 합 5만명이요, 울산성 안에 들어 있는 군사는 6000명 정도였다. 실제로 조명연합군의 수에 비교한다면 가등청정의 군사는 7, 8분의 1에도 불과한 소수였다.

어찌 됐든 양원의 군사는 울산에서 물러나 한양으로 돌아왔다. 양호와 마귀의 무리는 명나라 조정에 승전하였다는 첩서를 올려서 대명황제는 양호 이하 제장에게 은 10만냥을 하사하였다.
일보 후퇴 선택한 명군
이번 울산 싸움에서 죽은 명나라 군사는 1400여인이요, 부상한 자는 3000인에 가까웠다. 일본 군사는 4000여인이 죽었고, 부상한 수는 3000~4000명이었다. 이때에 명나라 조정의 형부시랑 여곤呂坤이 조선에 관한 소를 올렸는데 그 글은 아래와 같다.
朝鮮近我肘腋 日本若取而有之 日本藉其衆爲兵 就其地資食 進則斷我山東 漕運之路 退則窺我遼東 防備之域 不及一年 北京坐受其困 此大憂也 前年朝鮮請兵 朝廷二三其說 許援延援 朝鮮勢窮力屈 不折入爲日本 其勢不止 宜早決大計 幷力東征
조선이 우리의 팔꿈치와 겨드랑이처럼 가까우니 일본이 만약 빼앗아 차지한다면 일본은 그 백성들을 뽑아 군사로 삼을 것이며 그 땅을 취하여 군량을 돕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1년도 되지 않아 북경이 앉은 채로 곤경을 당할 것이니 이것은 나라의 큰 걱정입니다. 전년에 조선이 청병하나 조정에서 두세번 말하여 원조를 허락하고도 기일을 늦추었으니 조선은 형세가 궁하고 힘이 꺾이어 조선으로 들어가 일본을 막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마땅히 일찍 큰 계책을 결정하여 힘을 합쳐 동정하십시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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