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국제시장 ❸

사태를 파악한 덕수 아버지(정진영)는 일생일대의 가장 고통스러운 선택을 강요당한다. 가족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한다’고 믿었다면 아마도 온가족이 다시 배에서 내려야 하는 게 마땅할 수도 있다. 요즘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일가족 동반자살형’이다. 기계적 평등주의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모토로 하는 공리주의 논리를 따른다면 가장인 덕수 아버지는 막순이 1명보다는 나머지 가족의 행복을 선택했어야 했다. 결단의 순간, 주저하지 않고 아직 어린 큰아들 덕수에게 가장의 지위를 이양한 아버지는 4명의 가족을 배에 남겨둔 채 막순이를 찾아 다시 밧줄사다리를 타고 부두로 내려간다.
하지만 내려가 본들 그 아수라장에서 막순이를 찾을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해 보인다. 보기에 따라 4명의 가족을 포기하고 1명의 가족을 선택하는 대단히 비합리적인 결정이다.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하버드대(정치학)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뜻밖에도 베스트셀러에 오른 자신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이와 유사한 질문을 던진다. “제동장치가 고장 난 열차가 달려온다. 한쪽 철로에서는 5명의 인부가 일하고 있고, 또 다른 철로에선 1명의 인부가 일하고 있다. 당신이 열차의 진행방향을 바꿀 수 있다면 어느 쪽으로 열차를 달리게 할 것인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덕수 아버지는 1명의 인부를 구하기 위해 제동장치가 고장 난 열차를 5명의 인부 쪽으로 몰고 간 셈이다. 더구나 막순이가 미군 병사에 의해 미국으로 입양된 것으로 보건대 막순이를 지옥에서 건져내지도 못한 듯하다. 결과적으로 ‘괜한 짓’을 한 셈이다. 그렇다면 덕수 아버지의 선택은 비난받아야 할까. 그가 선택한 논리는 무엇이었을까.

아버지를 필요로 하는 나머지 자식들에게는 아버지가 없어도 그나마 어머니와 형제자매가 남아 있다. ‘계산적 합리주의’ 관점에서는 대단히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가족 누구 하나 소홀함 없이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어쩌면 최선의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나라’를 ‘국가國家’라고 부른다. 국가란 문자 그대로 한 가정이 확대된 개념이다. 유교적 국가관은 ‘국가의 지도자’가 한 가정의 ‘자애로운 아버지(benevolent father)’와 같기를 요구한다.
실제로 한 국가의 지도자가 덕수 아버지처럼 국민을 살피고, 제한된 자원을 가장 필요한 국민에게 분배한다면 이상국가가 실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마이클 샌델 교수의 질문에 대해 4명의 희생보다는 1명(막순이)의 희생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최소의 혜택을 누리는 우리 사회의 막순이’에 대한 배려를 ‘비합리적인 과잉복지’라고 몰아붙이는 건 아닐까. 한 국가를 가정이 확대된 공간으로 보고자했던 유교적 국가관은 과연 지나치게 이상적일까.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opo.ac.kr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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