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근수는 이순신을 강하게 몰아세웠다. “적장 가등청정이 바다를 건너오는 날을 알고도, 더군다나 그를 잡으라는 도원수의 장령을 받고도 왜 잡지를 않았는가? 가등청정에게 뇌물을 받고 놓아버린 것 아닌가.” 입을 꽉 다물고 있던 이순신이 드디어 입을 열어 그때 사정을 설명했다.
“가등청정과 소서행장 두 놈이 반목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자신들 나라의 군사 기밀을 우리나라의 군인에게, 하물며 일도의 육군대장이 되는 병마절도사(김응서) 또는 도원수의 진중을 찾아와 누설할 리가 있소? 정녕코 간교한 말로 우리를 큰바다로 유인, 격멸하자는 것이니 그 이리떼 같은 놈들이 와서 고하는 감언이설을 믿고 함정 속으로 스스로 빠지는 게 마땅하오? 그놈들이 임진년 이래로 수전水戰에서 우리에게 백전백패하여 배겨 낼 수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이런 반간계를 짜낸 것인데 어찌 빤하게 알고 속겠소?
윤근수는 이순신의 기백과 논리에 심취했다. 도도유창한 웅변에 윤근수는 정신이 나간 듯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러다 악형惡刑할 것을 잊어버렸다. 조정에 득실대던 서인과 북당들은 이렇게 이순신의 자백을 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윤근수는 세번째 국문에선 이순신을 고문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면서 “네가 적장 가등청정에게 뇌물을 받고 사로잡지 않고 놓아 주었지? 바로 자백하라”고 다그쳤다. 이순신은 “나는 할 말을 다하였소”라며 입을 닫아버렸다. 윤근수는 마지못하여 고문하기를 엄명하였다. 금부관리들은 이순신에게 주리를 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두 다리의 살이 터져 피가 줄줄 흘러내렸고, 정강이뼈는 허옇게 들어나 보였다. 사천대첩에서 적의 총알에 맞았을 때보다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이순신이 두 눈을 감고 입을 열지 않자 이번엔 벌겋게 달아오른 인도引刀로 순신의 넓적다리를 찢었다. 순신의 얼굴빛은 변함이 없었다. 윤근수는 “일전에 훈련원에서 말을 달리다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도 제 손으로 버들가지를 벗겨 끌어매고 다시 말을 타고 달린 독한 인물이다”고 소리를 지르며 고문을 멈췄다. 그러자 이순신은 그만 기절을 하고 말았다.
금부 옥졸마저 순신을 추앙
53세의 몸이다. 6년 동안이나 전쟁에서 노심勞心 노력努力으로 쇠약해진 몸이다. 8~9일간이나 걸음을 재촉하여 1000리의 길을 잡혀온 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악형을 당하니 어찌 분하지 않으랴! 이순신은 그날 밤 옥중에서 끙끙 앓았다. 몸에 열이 심하고 고통이 대단하였다. 명나라의 양동지가 영웅을 염려해 옥문 밖으로 찾아와 위문하고 약과 가루약을 전했다. 금부 옥사들도 이순신을 동정하여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이때 이억기는 10여장이 되는 언덕 위로 뛰어올라 건너 버렸다. 부친의 병에 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자르기까지 하여 효행이 드러났다. 무과에 급제한 후 경흥부사에 올라 울지내와 니탕개를 쳐 파하고, 온성부사로 자리를 옮겨 울마적鬱馬赤을 쳐 베었다. 당시 우상 정언신은 “이순신, 이억기는 명장 중에도 으뜸”이라고 하였다. 순천부사에 올랐다가 조정의 천거로 전라우수사가 되어 7년간 바다에서 40여차로 승첩했다.
이순신은 이억기의 진심을 전한 군관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해달라고 당부했다. “다시는 내왕을 하지 말게. 혐의를 받을 것이야. 내가 죽으면 영감밖에 수군을 맡을 사람이 없지 아니한가? 나를 생각지 말고 나랏일을 위하여 영감의 몸을 생각하게. 일본 수군이 전라우도 바다를 범할 날이 멀지 않으니 준비하시게.”
그러면서 이억기가 보낸 서간을 읽어달라고 군관에게 요청했다. 요지는 이러하였다. “지금 통제사 원균의 방략을 보니 수군이 오래지 않아 반드시 패할 것 같습니다. 저희는 죽을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今觀主帥元公之制置方略則 舟師不久必敗 我輩不知其死所矣.)” 닥쳐올 사변을 역력히 간파하고 순신의 비참한 모습에 눈물을 뿌리는 말이었다.
이억기의 눈물겨운 구명
이순신의 당부에도 이억기는 구명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과 친분이 있는 병조판서 이항복과 경림군 김명원에게 서간을 보내 순신의 억울함을 알렸다. 순신의 부하군관이던 송희립, 황대중黃大中의 무리도 상경해 대궐문 앞에 나아가 순신의 원통하고 억울한 사유를 읍소하였다. 그 무렵, 윤근수는 선조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이순신을 아무리 고문하여도 실토를 하지 아니하오니 유죄무죄를 알 수 없습니다.”
영의정 유성룡은 묵묵무언하고 그 외 재신은 “이순신을 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경림군 김명원이 나서 “일본인의 배타는 기술이 제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가등청정이 어찌 7일 동안이나 섬에 걸려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순신의 죄는 무고인가 합니다” 하였다. 선조는 김명원의 말을 듣고 깨달아 “내 생각에도 그러하다”고 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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