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 위안 받는 비정규직
드라마에 위안 받는 비정규직
  • 양재찬 대기자
  • 호수 166
  • 승인 2015.11.17 0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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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찬의 프리즘 | 비정규직 630만 시대

▲ 비정규직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드라마가 인기다. 비정규직 문제가 우리 사회의 큰 과제라는 방증이다.[사진=뉴시스]
드라마나 영화가 화제에 오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각본이 사회현실을 바탕으로 탄탄하고 배우들이 실감나는 연기를 해서이겠지만,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드라마와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다. 바로 작품에 담긴 시대적 가치, 즉 시대정신이다.

최근 몇 년 사이 노동시장 문제를 다룬 드라마와 영화가 여럿 만들어지고 있다. 2013년 드라마 ‘직장의 신’에 이어 지난해 말 ‘미생’이 케이블 드라마로선 보기 드문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지난해 말 개봉된 영화 ‘카트’와 지난 10월부터 종합편성채널 jtbc가 방영하는 드라마 ‘송곳’은 둘 다 대형 마트가 주무대이다.

‘송곳’은 마트 사업장에서 벌어지는 노사 갈등을 이분법적 대립 시각이 아닌 경영진, 중간 관리자, 노동자가 어떻게 생각하고 움직이는지를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우리가 ‘고객님’ 대접을 받으며 자주 찾는 대형 마트 뒤편에는 시간제 알바, 판촉담당, 계약직 등으로 불리며 차별 대우를 받는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한숨과 눈물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 작품 대부분이 비정규직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점은 그만큼 비정규직 문제가 우리 사회가 직면한 큰 과제라는 증거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비정규직보호법이 마련돼 시행된 지 올해로 8년째, ‘보호’란 명칭이 무색하게 비정규직 근로자는 되레 증가하고 정규ㆍ비정규직 간 임금격차도 더 벌어졌다.

2007년 570만명이던 비정규직은 올 8월 627만명으로 불어났다. 임금근로자 가운데 비정규직이 차지하는 비중이 정부 공식통계로 32.5%,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조사로는 44.7%로 절반에 육박한다. 우리가 자주 비교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1.8%)의 3~4배 수준이다.

박근혜 정부가 ‘미생未生’을 ‘완생完生’으로 바꾸겠다며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내놨지만, 상황을 되레 악화시킬 소지가 있는데다 국회도 깊이 있는 논의를 하지 않고 있다.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이름을 따 ‘장그래법’으로 불리는 정부 대책은 35세 이상 근로자가 원할 경우 사용기간 제한을 현행 2년에서 2년 더 연장하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사용기간을 늘린다고 비정규직이 줄어들까. 지금은 2년이 되기 전에 해고하는 편법을 쓰지만, 법이 바뀌면 4년이 되기 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그만두도록 만들 것이다. 연명하는 기간만 늘려줄 뿐 비정규직을 줄이는 근본 대책은 못 된다.

더 늦기 전에 각계 의견을 망라한 사회적 합의가 절실하다. 정부와 공공기관부터 단계적으로 비정규직을 줄여나가야 한다. 이와 함께 일정 규모 이상 대기업에 비정규직 사용을 자제시키고, 그 이하 중소기업에 대해선 비정규직의 임금과 복지 차별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유도해야 할 것이다. 정규직 전환과 채용에 적극적인 기업에 주어지는 세제 혜택을 확대하는 방안도 요구된다.

비정규직이 불어나는 현실을 방치하면 빈부격차와 양극화가 심화돼 사회가 불안해진다. 가계의 가처분소득을 감소시켜 내수가 부진하고 경제성장을 저해한다. 기업들로서도 당장은 인건비 등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우수인력 확보가 어렵고 직원들의 업무 숙련도와 로열티가 약화돼 장기적으론 마이너스다.

지난 10월 청년실업률이 7.4%로 2년 5개월 만에 낮게 나왔다지만, 실감이 안 나는 것은 시간제나 계약직 등 비정규직이 많아서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젊은이들 상당수가 비정규직인 나라의 미래는 어둡다. 드라마 ‘송곳’에서 주인공 이수인 과장과 함께 스토리를 이끄는 노동상담소장 구고신은 말한다.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고.

정부와 정치권, 정규직 채용 여력이 있는 큰 기업들은 비정규직 입장에 서서 주변을 돌아보라. 최고 정치지도자가 나서 국가의 미래를 보고 기업들을 설득해야 한다. 언제까지 임금근로자의 절반이 드라마나 보며 위안 받도록 외면할 텐가.
양재찬 더스쿠프 대기자 jayan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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