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의 무리가 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그 무리에 ‘조직의 논리’가 적용돼야 한다. 구성원 사이에 전문성에 의한 업무분장이 이뤄져야 하고, 각각의 업무에 따라 구성원들이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해야 한다. 집단의 의사결정은 전체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기 때문에 구성원들의 의사를 수렴해야 한다. 거지 무리나 강도 무리를 ‘거지조직’이나 ‘조직강도’라고 부르지 않는 것도 이런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판은 어떨까. 몇몇 ‘정치보스’와 그들을 따라 몰려다니는 정치꾼들의 모습은 이와 다르지 않다. 한두 명의 명망가들이 규합한 정치 패거리는 정당으로 포장돼 있지만 의견 개진이나 이의 제기는 없다. 일방의 지시와 절대 복종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나팔수’도 있고, ‘저격수’도 있는 것이다.
당연히 당론黨論은 존재할 리 없다. 대의명분이 있을 리 없고, 그걸 요구하는 것도 가당치 않다. 사실상 우두머리의 독단에 불과한 ‘지시’만 있을 뿐이다. 누군가 제 목소리를 내려 하면 “죽고 싶나?”와 같은 반응이 돌아온다. 조직이 없으니 2인자나 3인자도 없다. 우리 정치사에서 자신을 ‘조직의 2인자’라고 착각했다가 하루아침에 ‘목이 날아간’ 사례는 수두룩하지 않은가.
변화의 고비마다 수많은 ‘정치철새’가 이리저리 새 둥지를 찾아 날아다니는 이유도 사실 ‘조직 정치’가 아닌 ‘패거리 정치’에 있다. ‘철새 현상’은 대의명분 없는 ‘패거리 정치’의 자연스러운 산물일 뿐이라는 얘기다. 우리나라 폭력배들이 마피아, 야쿠자, 삼합회처럼 조직화되지 못한 채 패거리에 머물러 있는 건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정치판에서 정당 조직이 자리 잡지 못하고 ‘패거리 정치’만 계속되는 건 불행이다.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opo.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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