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친구 ❷
‘친구’의 홍보와 소개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건 주인공들의 ‘집단 질주 장면’이다. 이는 이 영화의 성격을 대변하고, 흥행 대박의 비결을 설명해 준다. 2001년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Zeitgeist)’을 단편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
수업이 끝나고 학교를 나서던 중호(정운택 분)가 말한다. “영화 보러 가자. 영화관까지 누가 빨리 가나 보자. 꼴찌가 돈 내기다.” 그러고는 저 혼자 일방으로 냅다 뛴다. 준석(유오성 분), 동수(장동건 분), 상택(서태화 분)은 어리둥절해 하지만 곧 영화관으로 질주한다. 영화를 볼 것인지와 영화를 본다면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내기를 할 것인지와 꼴찌가 관람료를 모두 낼 것인지 등에 대한 의견 개진도 합의도 없다.
이 대목은 이상李箱의 난해한 시 ‘오감도烏瞰圖’와 비슷하다. ‘13인의 무서운 아이와 무서워하는 아이가 뒤섞여 막다른 골목이라도 좋고 막다른 골목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도로를 질주한다.’ 영화 ‘친구’의 네 주인공은 목적과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다. 공부 못한다고 교사에게 모욕과 구타를 당하고 교실을 박차고 나온 깡패 아들 준석, 가난한 장의사의 아들 동수, 모범생 상택, 보따리 밀수꾼의 아들 중호. 이들에게 영화를 본다는 목적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학교 문을 나선 뒤 뚜렷이 할 일도 없는 따분하고 답답한 현실에서 누군가 함께 뛰자고 하니 뛸 뿐이다. 말 그대로 현실 도피의 질주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목적이 생기고 무력감과 불안감, 끔찍한 소외감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상이 ‘13인의 아해’의 질주로 탈출구가 안 보이는 절망과 불안함을 표현한 1934년은 일본이 만주사변 이후 파시즘 체제로 전환하고, 중일전쟁 준비로 전시 체제에 돌입하던 가장 불온한 시점이다. 일본의 기세로 우리 백성은 해방의 희망조차 품을 수 없었다. 되레 시시각각 다가오는 전쟁의 먹구름이 백성을 공황 상태로 몰아넣었다.
무서운 아이와 무서워하는 아이들이 뒤섞인 채로 누가 무서운 아이인지 누가 무서워하는 아이인지 구분조차 안 되는 상태로 막다른 골목이든 그렇지 않든 질주할 수밖에 없는 절망의 시대였다는 거다. 그렇다면 영화 ‘친구’의 집단 질주를 본 관객들은 왜 열광한 것일까. 1934년 그때처럼 2001년은 우리에게 출구가 보이지 않는 막다른 골목은 아니었을까.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opo.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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