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사가 경상도 부산포 근해의 연안 일대로 내려온 뒤로는 이순신의 조선 수군을 무서워하여 수세적 태도를 취했다. 육지에서만 간간이 병사를 움직여 공세를 취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경주와 진주에서 큰 싸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부산 해안 각처로 내려온 일본 제장들은 자신들의 군량을 본국인 명호옥, 적마관赤馬關 등지로부터 실어왔다. 울산 서생포西生浦를 시작으로, 동래 기장 좌수영, 부산, 양산, 김해, 웅천, 거제, 영등포까지 총 16곳의 주둔지를 벌여서 성채를 쌓고 소굴을 만들었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으로 넘어온 일본군 숫자는 육군 13만8000여인, 수군 6만여인, 진주성을 치기 위해 넘어온 별동대 2만인, 평양의 패보를 듣고 또다시 넘어온 군사 6만6000여인 등 총 25만인에 달했다.
그런데 지금 남아 있는 육군이 6만~7만에 불과하다고 하니, 그동안 일본군은 이순신 함대에 부서지는 등 여러 싸움에서 격파돼 죽은 자가 10만여인에 달했다. 전쟁에 죽은 것뿐만 아니라 질병과 도망으로 인하여 줄어든 것이 또한 많았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일본군과 조선군은 그 세력을 대등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부전수가는 부산에, 가등청정은 울산 서생포에, 소서행장은 웅천에 진을 치고 있었다.
병력은 총세 6만여인이었다. 조선군으로는 이순신 함대 5만여인이 한산도에 웅거하여 일본군과 대치하였는데 그 백전의 위세가 당당하였다. 그 세력은 이러하다.
이순신의 좌수영 수군 6000인
그 관하 5읍6진의 군사가 합계 1만5000인
이억기의 우수영 수군 6000인
그 관하 각읍 각진의 군사가 합계 1만4000인
원균 및 그 관하 합계가 9000인
이상 이순신의 삼도 세력이 총계 5만인이었다.
조선육군으로는 도원수 김명원의 군사가 1000인, 순변사 이빈의 군사가 1000인, 조방장 곽재우의 의병이 1만3000인인데 모두 의령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는 곽재우의 대군을 의지함이었다. 일본군사가 경상도 부산포 근해의 연안 일대로 내려온 뒤로는 이순신의 조선 수군을 무서워하여 수세를 취했다. 육지에선 간간이 병사를 움직여 공세를 취하였다.
그러던 중 경주와 진주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울산의 좌병사 박진이 민병 수천명을 모집해 경주성으로 진격했지만 참패를 당했다. 의병장 김호 등까지 적과 죽기로 싸워 서천西川의 물이 붉게 물들었다(1592년 8월 20일).
격파된 일본군 숫자만 10만명

박진은 이장손의 비격진천뢰를 얻어 조방장, 권응수, 판관 박의장 등을 선봉으로 삼아 경주를 다시 공격하였다. 비격진천뢰를 성안으로 발사해 일본군 30여인을 즉사시켰다. 이렇게 무서운 진천뢰가 계속 떨어지는 통에 일본 군사는 당해낼 수 없었는지 성을 버리고 울산 서생포로 달아나 버렸다. 박진이 경주성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던 거다(1592년 9월 8일).
이러던 와중에 일본의 태합 풍신수길은 조선의 남삼도(충청·경상·전라)를 할양한다는 것을 보증 받기 위해 명나라 황제에게 표문을 올리고 포로로 사로잡은 조선의 2명의 왕자를 돌려보내기로 허락했다. 수길의 표문表文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었다.
上聖普照之明 無微不悉 下國幽隱之曲 有求則鳴 欽惟皇帝陛下 天佑一德 日淸四方 皇極建而舞干羽于兩階 聖武昭而柔遠人于萬國 皇恩浩蕩 遍及遐方之蒼生 日本眇微 咸作天朝之赤子 屢托朝鮮而轉達 竟爲秘隔而不通 控訴無門 飮恨有日 增重鼎呂 共作藩籬之臣 豈愛髮膚 永獻海邦之貢
황제의 밝은 빛은 작은 것도 비추니 저희의 숨은 사정도 알고자 하시면 울림이 있을 것입니다 … 공경히 생각건대 황제 폐하는 하늘이 한결같은 덕을 도와서 날로 사방을 밝히셨습니다. 도리를 세워서 양 계단에서 간우(방패와 깃)를 춤추자 성무가 드러나서 만국의 먼 곳 사람을 회유하셨습니다. 황제폐하의 은덕이 넓어서 멀고 가까운 곳의 창생에게 두루 미치매 일본 같은 작은 나라도 모두 천자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여러 번 조선에 부탁하여 전달하여 달라 하였으나 끝내 숨기고 통해 주지 아니하매 호소하려 하여도 길이 없어 원한을 품은 지 오래입니다.… 신臣 수길은 … 정려(천하를 다스리는 상징물)보다도 더 무겁게 생각하여 함께 속국의 신하가 될 것이니, 어찌 몸을 아끼겠습니까. 영구히 바다지방의 공물을 바칠 것입니다….
이 무렵,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한산도에 자리를 잡고 이억기, 원균과 더불어 한양으로부터 퇴각하는 일본군을 일본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수로를 단절하는 계획을 정하였다. 탐망선의 보고에 따르면 울산으로부터 기장, 동래, 양산, 김해, 웅천까지 모두 16개의 주둔지가 있고 그 군사의 형세는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병선의 수는 무려 500여척이나 됐다. 순신은 명나라 병사가 남쪽으로 내려옮에 따라 일본군이 도망쳐 모인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따라 삼도의 주사를 거느리고 가덕도를 거쳐 웅천의 웅포로 진군하였다. 웅천은 소서행장이 주둔한 곳이었다.
이순신 위세에 눌린 일본군
순신의 함대는 선창에 열박하고 있는 적선에 공격을 선언했지만 소서행장은 일찍부터 이순신의 위세를 무서워하여 바다로 나오지 못했다. 5·6척의 배로 포구 경계 안쪽으로 못 들어오게 하다가 항구 안으로 들어가는 일을 반복했다. 반면 양쪽 동서 산록에 쌓아 놓은 포대에서는 총을 방사하여 실탄을 퍼부었다. 이곳은 소서행장의 군사가 새로 와서 주둔한 진이었던 터라, 육전에서 사용하던 전술이 많았다.
순신은 그날 밤 이억기 이하 제장을 불러 군사회의를 열고 내일의 전략을 토의하였다. 순신은 이렇게 분부했다. “일본 수군이 우리 함대를 두려워하여 감히 나와 항전하지 못하고 시종일관 험지에 의거하여 배를 감추고 있으니 실로 섬멸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포구 안을 조사한즉 전선 7·8척은 가히 들어갈 만하니, 내일은 그렇게 해보라.”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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