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 장군의 결기 “오늘 우리가 죽거나 적이 죽는다”
권율 장군의 결기 “오늘 우리가 죽거나 적이 죽는다”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 호수 149
  • 승인 2015.07.10 21: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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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72

적군의 선봉이 들어오고 그 뒤에 대군이 좌우익으로 나누어 밀려오는 것이 보였다. 홍백청황 등 오색 기치를 수없이 날리는 장수와 별별 기기괴한 모양을 한 장졸들은 함성을 치며 행주산성을 에워쌌다. 행주대첩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 목책 안과 흙구덩이 속에 숨어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총알과 화살을 빗발같이 퍼부어 쏘았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1593년 2월 12일. 한성에 있는 일본군은 행주산성을 치기로 결의했다. 목촌중자 등 여러 적장이 2만군을 이끌고 행주산성을 향해 쳐들어왔다. 권율은 전라도 군사 7000명, 방어사 조경이 거느린 군사 3000명, 전라도 처영의 승군 1000명, 행주산성 부근의 민병 1000명 등 합 1만200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산성에 있었다. 산성 밑으로는 여러 겹으로 목책을 두르고 또 땅을 많이 파놨다.

이 고양군 행주산성은 형승지지(땅의 모습이 뛰어난 곳)였다. 남쪽은 한강에 임한 절벽이요, 동쪽과 북쪽은 평야였지만 역시 절벽이었다. 오직 서쪽으로 사람이 통행할 수 있었는데, 이마저도 좁은 길에 불과했다. 산은 크지 않지만 협곡이 많아 1만여명 군사를 감춰놓아도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12일 아침에 척후병은 일본군이 행주를 향하여 쳐들어온다고 보고했다. 권율은 피하여 달아나려 했지만 한강에 배가 없어 사투死鬪하기로 작정했다. 군사들에게 3번 먹을 밥을 싸주게 하고 몸소 군사들이 쉬는 곳으로 순회하면서 “오늘은 적병을 다 죽이거나 우리가 다 죽거나 할 날이다. 이 세 덩어리 밥을 다 먹고도 적을 파하지 못하면 다시는 밥을 먹을 수 없을 것이다”고 격려했다.

권율은 의승장 처영에게 승군 1000명을 거느리고 산성 서쪽에 있는 관문을 막게 했다. 또한 자기 부하와 조경 등 제장에겐 구역을 할당해 지키게 했다. 행주의 부녀와 아동들에게까지 돌멩이를 주워 나르게 했고, 가마솥에 물을 끓이게도 했다.

이윽고 적군의 선봉이 들어오고 그 뒤에 대군이 좌우익으로 나누어 밀려오는 것이 보였다. 홍백청황 등 오색 기치를 수없이 날리는 장수와 별별 기기괴한 모양을 한 장졸들은 함성을 치며 행주산성을 에워쌌다. 권율은 명령을 내려 적군이 목책 밑에 당도할 때까지 꼼짝 말라고 하였다.

적군이 산성 밑으로 바짝 다가서자 권율은 칼을 빼어들고 군사에게 호령했다. “지금이다. 싸우자.” 목책 안과 흙구덩이 속에 숨어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총알과 화살을 빗발같이 퍼부어 쏘았다. 조선군은 높은 곳에서 몸을 숨기고 쏘는 것이요, 일본군은 낮은 벌판에서 몸을 드러내놓고 싸우는 터였다. 이 때문에 조선군 사상은 적었지만 일본군은 전멸하다시피 했다.

권율의 지략에 日 좌충우돌

▲ 권율 장군은 행주산성의 부녀와 아이들에게까지 전투 준비를 도울 것을 요청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그러나 적은 완강하게 저항을 계속했다. 후계부대를 내보내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웠다. 이리 하는 동안에 적군은 목책 부근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목책 안에서 열탕과 시석이 마구 날아와 일본군은 쓰러지기 바빴다. 해는 석양이 거의 되고 산성 앞 벌판에는 피가 냇물을 이루었다. 조선 군사들도 반이나 죽고 화살도 다하였다. 돌멩이를 나르는 부녀자들도 손에 피가 흘렀다.

하지만 일본군도 물러서지 않았다. 때마침 이순신의 조방장이던 충청수사 정걸이 권율의 위급함을 알고 화살과 군량을 배에 싣고 산성 절벽 밑에 들어와 구원하였다. 이 행주 싸움에 정걸의 화살 보급이 없었으면 실패할 뻔하였다. 의외의 원조를 얻은 피폐한 사졸은 100배의 용기를 냈다. 이 싸움에서 가장 참혹했던 곳은 산성 서쪽이었다.

이쪽은 절벽이라는 지리적 험고가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일본군이 작정하고 공략을 했다. 무려 아홉차례나 돌격을 할 정도였는데, 이곳을 맡고 있던 승장 처영은 권율에게 “승군이 반 이상이나 죽었으니 다른 장수로 교체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 하지만 권율은 이 말을 듣지 않고 분노를 표했다. “이 위급한 때에 교체할 여유가 있느냐? 다 죽기로써 싸워라. 이의가 있다 하면 군법으로 시행하리라.”

처영은 끝끝내 악전고투했다. 승군 1000명 중에 900명이 넘게 죽어도 퇴각하지 않았고, 마침내 적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적은 최후의 돌격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밤을 무릅쓰고 횃불을 가지고 돌격하여 목책에 불을 놓을 계획을 썼다. 그러자 조선군은 물을 가지고 불을 껐다. 석양의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 버렸다. 불로 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적군은 시체를 버리고 총퇴각을 시작하였다.

권율은 책문을 열고 군사를 몰고 적군을 추격하여 무찌르니 적은 밟혀 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권율 장군은 이튿날 아침에 적의 머리 130급을 베고 시체의 사지를 끊어 팔과 다리를 나뭇가지에 걸었다. 일본군이 자행한 한성대학살의 보복 차원이었다. 조정은 권율을 자헌대부資憲大夫, 조경을 가선대부嘉善大夫, 승장僧將 처영을 절충장군당상折衝將軍堂上에 올려 그 전공을 포상하였다.

일본군, 권율에게 복수 ‘다짐’

하지만 권율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행주산성에서 멀지 않은 한성에 적의 대군이 있으니 행주의 패보를 들으면 반드시 또 복수를 하러 쳐들어올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권율은 싸움에 피곤한 군사를 쉬게 하기 위해 파주산성으로 자리를 옮겼다. 백성들 역시 멀리 피신하도록 조치했다.

실제로 한성에 있는 부전수가는 권율이 일본군의 시체까지 끊어 나무에 걸어 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소서행장, 가등청정 두 장수로 하여금 2만5000군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을 쳐들어가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빈 성만 있고 사람은커녕 개미도 없다. 적군은 산성에 불을 놓고 그저 돌아갔다. 행주의 대승첩은 조선 사람에게 또 한번 용기를 넣어 주었다.

방어사 이시언, 고언백, 김응서, 조방장 정희현鄭希玄, 박명현朴名賢은 유병遊兵이 되어 해월령蟹月嶺을 막고, 의병장 박유인朴惟仁, 윤선정尹先正, 이산휘 등은 창릉昌陵 경릉敬陵 사이에 숨어 적군을 엄습했다. 이 때문에 적군이 마을로 다니며 말먹이와 가축 등 군수품을 구하지 못하여 큰 곤란을 입게 되었다. 한편 명 제독 이여송은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도망치던 중 행주대첩의 승전보를 듣고 퇴병을 후회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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