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부 눈물의 호소 “충의를 지켜달라”
정문부 눈물의 호소 “충의를 지켜달라”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 호수 148
  • 승인 2015.07.03 15: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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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등청정이 함경도에 머무르고 있을 때 대규모 민란이 일어났다. 가등청정은 민란을 틈타 회령을 점령했다. 여기에 회령의 향리가 조선의 두 왕자를 가등청정에게 넘기며 조선의 운명은 더욱 위태로워졌다. 하지만 북평사 정문부의 호소로 함경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반전의 기회가 온 것이다.

▲ 의기를 들고 일어나 외적을 격파하고 대의와 인륜을 바로 심자. [사진=더스쿠프 포토]

일본 명호옥 행영에 있던 수길은 평양의 패전을 듣고 크게 화를 냈다. 다시 6만명의 병사와 증전장성, 대곡길계 등의 7명의 장수를 보내는데 이때 이달정종도 자원하고 따라 나섰다. 한성에 새로 들어온 6만명의 군사는 남산 밑에 본진을 세웠다.

가등청정이 함경도에 있을 때, 대규모 민란이 일어났다. 함격북도 백성들은 이씨조선이 되고부터는 조정의 배척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수백년 동안 나랏일에 참여하지 못하고 가슴에 품었던 불만이 이번 전쟁을 기회로 터진 것이다. 난민은 가는 곳마다 지방관을 죽이며 그 세를 확장했다.

이에 앞서 함경감사 유영립이 가등청정의 군사를 해정창에서 만났다. 가등청정의 군사는 북병사 한극함의 군사 육진정병과의 전투에서 형세가 불리해지자 해정창의 창고 안으로 숨었다. 유영립은 “산돼지 잡으려다가 집돼지 놓치겠소!” 하고 급히 함흥감영으로 돌아갔다. 남병사 이혼도 갑산으로 들어갔다가 난민에게 잡혀 죽었다. 유영립도 난민에게 쫓기다 산곡에서 잡혔다. 그는 다시 도망쳐 행재소로 갔다.

이렇게 난민이 소란을 피우는 동안 적장 과도직무는 함흥감영을 손쉽게 점령했다. 가등청정의 군사도 육진기병을 야습으로 뚫어냈다. 이어 소란을 틈타 아무런 저항 없이 회령會寧까지 진입했다. 회령 향리 국경인鞠景仁은 난민을 시켜 두 왕자 임해군 진과 순화군 규, 그리고 그 일행을 잡아 가등청정에게 바쳤다. 가등청정은 두 왕자와 그 일행인 김귀영 황정욱 황혁 이개 윤탁연 등의 무리 200명을 불러들였다. 그는 일행의 결박을 풀고 두 왕자는 가등청정과 함께 항상 식사를 같이 했다.

가등청정은 국경인에게 두 왕자를 생포한 공으로 북도판형사라는 일본 벼슬을 내려 북도의 치안을 담당하게 했다. 그는 육진도 점령하고 돌아와 국경인을 비롯해 경성의 국세필鞠世弼과 명천의 정말수鄭末守로 하여금 일본 장수들과 함께 함경도 22군을 나눠 지키게 했다. 이어 두 왕자와 일행들을 데리고 안변성에서 겨울을 지내게 됐다.

제자 앞에서 충의 호소한 정문부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는 본래 학문과 덕행이 있는 사람으로 함경도 내에 그의 제자가 많았다. 정문부도 처음에는 난민에게 잡혔었지만 제자들이 구출해냈다. 정문부는 여러 제자를 모아 놓고 눈물을 뿌리며 말했다.

“이 같은 판탕지세에는 충의가 가장 크니, 삼남 각도와 경기 이북에는 곳곳마다 의기를 들고 일어나 충의의 도리를 다한다 하거든, 우리 북도 사람은 충의는 고사하고 난민이 곳곳마다 일어나 임금을 배반하고 수령과 장수를 살해하고 왕자를 포박해 적에게 바쳤으니 200년간 나라의 은혜를 받던 신민의 명분이라고는 땅을 비로 쓸어보아도 없구나! 어찌 타도 사람을 대하리오? 지금이라도 우리 본도 내 유생 사림은 어서 의기를 들고 일어나 난민을 타일러 의를 향하게 하고 외적外敵을 격파하고 대의와 인륜을 바로 심자!”

제자들은 감동했다. 이 중 정붕수鄭鵬壽,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原 등은 의병을 모집했다. 강문우姜文佑가 선봉으로 나서 난민을 해산시키고 적군에 투항한 국경인을 잡아 능지처참했다. 이어 격문을 도내에 날려 대의를 천명했다. 정문부는 3만여명의 대군을 모아 각처의 난민을 모두 평정하고 일본군이 점령한 단천성과 길주성을 에워쌌다.

길주성에 있는 일본장수 가등청병위와 단천성에 있는 가등좌위문의 군사는 정문부의 대군을 대적하지 못했다. 그래서 안변성에 있는 가등청정에게 구원을 청했다. 길주성과 단천성 내에 농성하던 이들은 정문부의 동계작전에 에워싸인 지 90일 만에 식량과 화약이 다해 전멸하고 말았다. 함경도 내에서 죽은 가등청정의 군사가 이 동계작전에서 3000명이나 됐다. 한 자나 되는 눈이 녹은 뒤에 가등청정이 구원을 나섰으나 이미 전멸하고 난 뒤였다.

마침 한성에 있는 총대장 부전수가가 평양의 패전으로 장수들을 한성으로 불렀다. 가등 청정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면목 없이 서울로 올라갔다. 이때 한성부근에 있던 전라감사 권율은 고양 행주에 머물러 있었다, 순변사 이빈은 파주, 도원수 김명원은 임진강 남안, 체찰사 유성룡은 동파에 있었다. 이여송이 조선군까지 평양이북으로 끌고 가려 하던 것은 표면적으로는 조선군의 고립을 걱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군이 사실은 명군이 물러간 뒤에 혹시나 일본군을 이길까 싶은 시기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권율을 공략해야 했던 일본군

▲ 정문부의 호소로 함경도에 의병이 모이게 됐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벽제관 한 번 싸움에 명병의 예기를 좌절시킨 일본군은 평양에서 잃었던 기세를 회복해 다시 임진강을 건너 개성을 치려 했다. 일본군의 계책으로는 명나라 대군과 결전하려면 먼저 한성 부근에 진을 치고 있는 조선의 각 장령의 군사를 소탕하는 것이 선결문제였다. 그중에도 행주산성에 진을 친 권율의 군사는 수원 독성禿城산성에 웅거했을 때부터 일본군이 이기지 못한 강적이었다.

때문에 일본군은 권율을 먼저 칠 생각이었다. 한성에서 가까운 행주산성에 이 강적을 두고는 임진강 이북으로 출병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계사 1593년 2월 12일. 한성에 있는 일본군은 행주산성을 치기로 의결했다. 목촌중자, 장곡천등오랑 대곡길계의 등 여러 적장이 병사 2만명을 이끌고 행주산성을 향해 쳐들어갔다.

권율은 전라도 군사 7000명, 방어사 조경이 거느린 군사 3000명, 전라도 처영의 승군 1000명, 행주산성 부근의 민병 1000명, 합 1만2000여명의 군사를 데리고 행주산성에 있었다. 산성 밑으로는 여러 겹으로 목책을 두르고 땅을 파놓아 군사를 감춰두기에 편리했다. 행주산성은 협곡이 많고 통행로가 좁아 만여명의 군사를 숨겨놓아도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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