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글씨, 뻔하디뻔한 누명
주홍글씨, 뻔하디뻔한 누명
  •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 호수 144
  • 승인 2015.06.05 12: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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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장미의 이름 ❺

▲ 수도사는 ‘악마’라는 말만 나와도 공포에 질려 얼굴을 가리며 성호를 긋는다.
교회는 어떻게 중세를 지배하게 됐을까. 당시 교회 권력은 인간을 두려움과 공포 속에 가뒀다. 인간이 두려움에서 해방된다면 더 이상 신앙에 매달릴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교회의 권력이 몰락하는 것을 의미했다.

기독교가 생기기 전에 나온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윌리엄 신부와 프란치스코파는 인간의 이성을 수용했다. 웃음을 허용하는 것은 곧 인간 이성을 허용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악마에 대한 두려움을 기초로 탄생한 베네딕트파 교회 권력의 입장에서는 현실세계에 ‘희극’이나 ‘웃음’, 다시 말해 이성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비극’만이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비극’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교회의 존재가치를 부각시키고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

베네딕트파의 이런 신념은 영화에 등장하는 조각상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수도원 곳곳에 새겨진 조각상은 아름다운 천사의 형상이 아니다. 온갖 기괴하고 보기에도 끔찍한 악마의 형상뿐이다. 두려움에 빠진 인간이 신에게만 매달릴 수 있게 한 장치다. 이렇게 악마와 악령의 존재를 확대함으로써 그들의 권력은 굳건해져 갔다.

물론 예수가 악마를 퇴치한다는 말은 성경 어느 구절에도 없다. 그러나 드라큘라 영화에서 십자가가 버젓이 악마를 물리치는 상징으로 둔갑한 것처럼 영화에 등장하는 수도사는 ‘악마’라는 말만 나오면 공포에 질려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며 성호를 긋는다. 전형적인 ‘병 주고 약 주는’ 방식이다. 실제로 걸리지도 않은 병에 걸렸다며 환자에게 비싼 약을 파는 약장사나, 과잉진료를 하는 의사와 다를 바 없다.

부적을 써 붙이지 않으면 집안에 끔찍한 액운이 닥친다고 공포심을 일으켜 부적을 파는 무당의 수법도 마찬가지다. 병원엔 아픈 사람이 많아야 하고, 장의사에겐 죽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런 ‘교회 장사꾼’의 허구성을 윌리엄 신부와 호르헤 신부의 논쟁을 통해 통렬하게 비판한다. 에코의 비판은 중세 암흑시대를 되돌아보자는 게 아니다. 현대사회의 권력 구조를 조롱하는 것이다.

지금은 중세도 근대도 아닌 21세기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기존 질서가 사람들을 통치하는 논리는 700년전 호르헤 신부의 논리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기존 질서를 지키는 이들은 개혁과 진보를 말하는 이들에게 호르헤 신부처럼 “웃음은 인간을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다”는 논리를 그대로 답습한다.

‘안보위협’과 ‘경제안정’ ‘사회안정’을 내세우며 국민을 공포에 빠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을 통해서만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영화에서 교회개혁을 주장하던 페르지오 신부를 악령의 사주를 받은 이단으로 몰아 화형에 처하는 장면과도 닮았다. 호르헤 신부는 빈민구제를 위해 교회재산을 나눠주자고 주장하는 페르지오 신부에게 ‘수도사 살인’의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페르지오 신부가 살인혐의를 부인하자 고문을 하겠다고 협박한다.

결국 페르지오 신부는 “모두 고백할 테니 고문만은 말아 달라”고 하며 “악마가 나로 하여금 살인을 하라고 사주했다”고 거짓자백을 한다. 군부독재 시절,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개혁과 분배의 정의를 외친 이들을 ‘빨갱이’로 낙인 찍고, 고문을 통해 “나는 김일성(악마)의 사주를 받았다”고 거짓자백을 받은 것과 과연 무엇이 다를까.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opo.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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