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장미의 이름 ❹

이런 시선은 영화 초반부에 잘 드러난다. 윌리엄 신부는 제자 앗소를 데리고 수도원에서 발생한 ‘수도사 살인사건’의 현장조사에 나선다. 현장에 도착하자 까마득한 절벽 위에는 요새처럼 견고한 수도원과 도서관이 보인다. 권위적이고 배타적인 모습이다. 인간의 접근을 철저하게 막고 있다. 윌리엄이 도서관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한 수도사의 핏자국을 더듬어 보던 중, 갑자기 절벽 위 수도원에서 ‘개구멍’이 열린다.
그리고 그 개구멍을 통해 수도원의 지저분한 음식 쓰레기가 절벽을 타고 쏟아져 내린다. 절벽 아래에서 그 쓰레기 투척시간을 기다리던 빈민들은 음식 쓰레기를 차지하기 위한 아귀다툼을 벌인다. 교회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염원으로 지상에 세워졌다. 그러나 어느새 교회는 인간과 격리된 채 인간 위에 군림하는 ‘권력’으로 자리 잡았다. 어처구니없게도 교회의 주인이어야 할 인간은 교회에서 먹다 남은 쓰레기로 삶을 연명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수도사가 결혼식장의 축의금 접수대 같은 테이블을 설치해 놓고 마을 주민으로부터 ‘공물’을 접수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벙거지를 눌러쓴 거지 같은 몰골의 주민들이 닭 한마리, 보리쌀 한 되를 들고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줄을 서서 공물을 바친다. 접수대의 수도사는 접수증 대신 무표정하게 사무적으로 한마디 던진다. “하늘나라에서 50배로 보답 받으리라.”
공물을 바치는 거지몰골의 주민도 그 무성의한 약속을 썩 믿지는 않는 듯 권태로운 표정을 짓는다. 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교회와 인간의 이 기묘한 관계는 윌리엄 신부가 명탐정 셜록 홈즈나 콜롬보 형사처럼 돋보기를 들고 ‘수도원 살인사건’을 추적해가는 원인과 배경이다. 영화는 묻는다. 교회는 어쩌다 인간 위에 군림하는 권력이 됐을까. 왜 자기 먹을 것도 부족한 주민이 교회에 공물을 바칠까.
자기가 먹을 것을 모두 교회에 바치고 자신은 왜 그 교회에서 먹다 버린 쓰레기로 연명해야 할까. 영화 속에서 호르헤 신부가 ‘웃음’에 치를 떠는 모습은 권력이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수도사 연쇄살인사건의 총지휘를 맡은 호르헤 신부는 말한다. “웃음은 인간을 공포로부터 해방시킨다. 두려움이 없다면 신의 존재도 필요 없다.
인간은 두려움의 대상이 있어야 신앙이 필요하다. 때문에 교회로서는 인간이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돼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웃어서는 안 된다.” 수단과 목적이 바뀌었다는 거다. 결국 신앙은 인간 구원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교회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신앙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고 있다.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opo.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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