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작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보너스로 제공한 모양인데, 제대로 된 보너스가 아니다. 원어를 한글로 번역해 넣는 과정에서 내용마저 이상하게 전달됐다. 원작 「장미의 이름」의 정확한 마지막 결구는 이렇다. “태초의 장미는 이름으로 아직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이름뿐(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이 문구는 12세기 초 베네딕트파 수도승이자 시인이었던 클루니 베르나르(Bernard of Cluny) 신부의 ‘세상에 대한 경멸(De Contemptu Mundi)’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고대 로마는 이름으로서 아직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의 헛된 이름뿐”이라는 구절을 가지고 에코가 장난을 친 것이다. 로마를 발음이 비슷한 장미(rosa)로 바꿨을 뿐 ‘장미’ 자체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에코가 전하고자 했던 진정한 의미는 이것이 아니었을까. “진리란 이름은 아직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이름뿐.”
앗소는 영화에서 니체의 관점으로 내레이터 역할을 하고 있다. 앗소는 먼 훗날 윌리엄을 평가하면서 “그분이 지적 자만심에 빠져 저지른 죄도 이제는 용서하기로 한다”고 말한다. 윌리엄이 갖고 있던 신념, 이를테면 인간이 이성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오류였다는 지적이다. 인간은 윌리엄처럼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고 종합해 세상을 이해해야 하지만 앗소의 관점에서 그런 탐구의 결과는 반드시 진리일 수는 없다는 거다.
쉽게 말해 그것 역시 ‘단편적인 진리’에 불과할 뿐 보편타당한 진리는 아니라는 의미다. 신의 진리가 허구인 것처럼 인간의 진리도 사실은 허구일 수 있다. 근대에 이르러 인간은 진리의 독점권을 신으로부터 빼앗았다. 그리고 ‘보편 타당한 진리’라고 포장된 ‘단편적인 진리’는 이념 또는 법의 이름으로 우리 사회 도처에 만연해 있다.
호르헤 신부가 독을 바른 금서의 종이를 찢어 입에 넣고 거품을 물며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모습과 비슷하다. 상대방의 ‘거짓진리’를 인정하느니 차라리 상대방의 ‘거짓진리’를 껴안고 불구덩이로 뛰어들어 공멸하려는 기세다. 중세의 수많은 호르헤 신부의 망령이 700년의 시간을 넘어 환생한 것처럼 말이다. 이 혼란은 어쩌면 신보다도 훨씬 불완전한 인간에게 진리를 맡긴 윌리엄과 근대의 죄일지 모른다.
그러나 앗소의 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나의 인생에서 언제나 가장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수도원에서 만나 짧은 사랑을 나눴던 이름도 모르는 그녀였다.” 앗소의 신분은 수도사다. 이름도 모르는 빈민 여자와 육체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죄악이어야 했다. 그러나 반대로 그녀에 대한 사랑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진실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영화에서 앗소가 수도원의 어두운 주방 한구석에서 벌이는 짧은 정사장면은 매우 따뜻하고 편안한 시선으로 그려진다. 니체의 말대로 ‘정말 인간적인 모습’이다. 에코는 진리라는 실체도 없는 괴물을 둘러싼 논쟁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영혼과 사랑’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야수의 으르렁거림이 가득찬 지금 우리 사회에 인간의 영혼과 사랑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opo.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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