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담과 변응정은 수하병사 1000여명을 거느리고 요로인 웅치(전북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와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를 연결하는 고개)에 목책을 만들고 산길을 끊어 적병이 오는 길을 막았다. 과연 수만의 적병이 웅치로 몰려 들었다. 웅치전투가 막을 올리고 있었다.

첫째로 전라도는 양전옥토가 많아 조선의 곡창이었다. 다른 물산도 풍부해 많은 군사가 조선에 주둔하려면 전라도가 필요했다. 둘째 조선 7도를 손에 넣고도 이순신 한사람 때문에 전라도에 발을 붙이지 못한다는 건 일본군의 위신을 스스로 깎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셋째 가장 두렵고 가장 미운 이순신이 활동하는 책원지를 없애려면 전라도를 손에 넣어야 했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한산도의 패전 이래 육로陸路를 통해 전라도를 차지하려 했다. 수로에서 육로로 전략을 수정한 거였다.
실제로 적병은 한성 이북으로 갔던 군사를 도로 불러들였다. 전라도 공략을 위해서였다. 1592년 7월 적병은 경상우도 초계로부터 안의安義와 전라도 장수長水를 지나 전주를 치려 하였다. 이때 김제군수 정담과 해남현감 변응정은 전라감사 이광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전라도를 노리는 적군은 육로를 통해 쳐들어올 것이오. 이순신에게 9전9패했으니, 수로를 통해 들어올 확률이 없소. 전라도의 경계선을 잘 지키지 않으면 적세가 창궐할 것이오.”
하지만 이광은 용인에서 패전한 경험 탓에 겁을 집어먹었다. “나는 전주성을 지킬 터이니…”라는 핑계를 대면서 출병을 미뤘다. 정담과 변응정은 분개하여 자기네의 수하 병사 1000여명을 거느리고 요로인 웅치(전북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와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를 연결하는 고개)에 목책을 만들고 산길을 끊어 적병이 오는 길을 막았다.
日 수로 버리고 육로 택해

하지만 종일 싸움을 거듭한 탓에 조선군도 거의 다 죽었다. 그렇게 200명밖에 남지 않은 때에 적병은 뒤로 물러가는 듯하더니 밤에 다시 몰려왔다. 이번엔 삼로三路를 통해 밀려와 정담의 진을 포위하고 항복하라고 외쳤다. 정담은 단연히 항복을 거절하고 싸움을 계속할 것을 엄명하였다. 그리고 칼을 빼어들고 선두에 나서 싸움을 독려하다가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정담이 전사한 뒤 변응정이 남은 군사를 지휘했지만 그 역시 철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정담과 변응정의 충의에 감격한 남은 군사들도 싸우다 죽었다. 웅치에는 시체가 넘쳤고, 그 때문에 길이 막혔다. 적장은 자신들의 군사를 시켜 조선군 장졸의 시체를 모아 큰 무덤을 여럿 만들고 목패를 깎아 글을 썼다.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조선국 충신 의사를 조상한다).” 이게 1592년 7월 7~8일 벌어진 웅치전투다. 참고로 7월 8일엔 바다에서 한산대첩이 있었다.
웅치에서 많은 군사를 상실한 일본군은 그 이튿날 전주성 밖에 다다랐다. 적병이 몰려오는 것을 본 전주성 관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달아나려 했지만 감사 이광은 달랐다. 선화당에 서 나서지 않는 것으로 봤을 때 성과 함께 죽기를 각오한 듯했다. 이때에 전 홍문관 전적(정6품) 이정란李廷鸞이 문관 조복을 입고 성내에 들어와 달아나려는 관리와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다 죽을지언정 전주성을 적군에게 내어주지는 못하리라.”
백발이 성성한 이정란의 충의는 전주 관리와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많은 이들이 전주성을 지키기로 맹세하였다. 그러자 적병의 기세가 꺾였다. 전주성이 좀처럼 깨지지 않는데다 전라도 사람들이 지나치게 용맹해 충청도 방면으로 물러가기 시작했다. 이 무렵, 평안도 도순찰사 이원익과 순변사 이빈李蘋은 압록강 강변포수와 합하여 수천명 군사를 거느리고 순안으로 와 유진했다.
별장 김응서金應瑞는 용강, 삼화三和, 증산甑山, 강서江西 4읍의 군사를 모아 20곳에 의병疑兵을 벌이고 평양 서쪽에 진을 쳤다. 황해수사 김억추金億秋는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 하류에 웅거했다. 하지만 적이 무서워 감히 싸우는 장수는 없었다. 평양부 기생 계월향桂月香은 그 아름다움이 짐짓 당대 절색이었다. 어떤 적장에게 잡힌 계월향은 이렇게 작정을 했다. “헛되이 죽는 것은 무익한 일이니 적장의 머리를 베어 나라에 갚으리라.”
적장 머리 베고 자결한 기생
실제로 그녀는 적장의 수청을 들면서 안심시켰다. 별장 김응서를 친오라비라며 성중으로 불러들이기까지 했다. 적장은 계월향의 자색을 탐애하였다. 그 적장의 성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용력勇力만은 소서행장의 부하 중 최고였다고 한다. 계월향은 적장이 잠든 때를 타 김응서를 시켜 적장의 목을 벴다. 그리곤 자신도 ‘몸이 더렵혀졌다’는 이유로 자결을 했다. 김응서는 그 적장의 수급을 조정에 올리고 평안도방어사가 되었다.
홍량호洪良浩의 「이계집」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김경서金景瑞는 초명이 응서다. 일전에 기녀 계월향과 정이 있었다. 이때 소서행장의 부하 중 날래고 용맹한 자가 계월향을 좋아하게 되었다. 계월향은 김응서를 성으로 불러들여 자기의 친오라비라 속였다. 그 적장이 깊이 잠든 틈을 타 김응서로 하여금 목을 베게 하였다. 그 수급을 들고 성을 나설 때 기녀 계월향이 뒤따랐다. 김응서는 이 일이 적진에 발각되면 두 사람이 함께 살아나기는 어려우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칼을 휘둘러 기녀를 베고 성을 넘어 돌아왔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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