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태합 풍신수길은 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육전에서는 백전백승하여 무적이었지만 이순신의 함대를 만나선 9번 싸워서 9번을 패했기 때문이었다. 풍신수길은 그래서 일본 수군이 연전연패를 하는 이유를 알아오라고 엄명했다. 하지만 별다른 수가 나오질 않았다. 풍신수길은 결국 순신의 힘을 빼놓을 계략을 내놓는데….

대전大戰이 벌어진 안골포 연안에는 적들의 시체가 가득했다. 적병이 도망가기 전 화장을 한 통에 살과 뼈가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적군이 얼마나 죽었는지는 헤아릴 수 없지만 남은 수족과 머리를 감안하면 3000명은 족히 넘을 것 같았다. 순신은 함대를 몰고 안골포를 떠나 양산군 낙동강 어구의 김해부로 나오는 포구와 명지도(부산시 강서구 명지동), 감동포(부산시 북구 구포동)라는 데를 수색하였으나 적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순신이 또 온다 하여 도망간 모양이었다. 순신은 동래땅 몰운대 앞바다에 함대를 벌여 진을 치고 적의 형적을 정찰하였다. 이날 술시에 김해 금단곶 봉화대에 파견하였던 탐망군 경상우수영 수군 허수광許水光이 돌아와 이렇게 고했다. “금단곶 봉화대에 망을 보러 올라가는 길에 봉우리 아래 암자에 있는 노승을 데리고 올라가 연기를 피우면서 바라보니 낙동강 깊은 목에 여기저기 정박한 적함이 100여척이나 되었습니다.
노승의 말에 따르면 매일 50척씩이나 되는 적선이 몰려온 게 11일이나 됩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장들은 순신에게 강 깊은 목에 정박한 적선을 때려 부수기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순신은 적함을 토벌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반론을 폈다. 육군 없이는 수군만으로는 강목에서 싸우는 건 병가에서 꺼리는 전술이라는 게 이유였다. 이후 순신은 함대를 몰고 천성보로 물러왔다. 그 밤으로 회군하여 12일 새벽에 한산도로 돌아왔다.
이순신이 이렇게 적을 그냥 두고 회군하는 이유는 대략 세가지였다. 첫째는 한산도와 안골포 싸움에 패하여 예기를 상실한 적의 수군이 싸우기를 피하므로 우리나라 육군과 협력이 없고는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둘째는 많은 군사가 여러 날 싸워 피곤할 뿐만 아니라 적의 탄환과 화살에 맞아 상한 사람이 많았다. 또한 군량이 고갈되면 전라도에 돌아가기 전에는 얻기 어려웠다.
셋째는 금산을 점령한 적세가 매우 단단해 전주까지 범하였다는 경보가 왔으니 잘못된다면 조선군의 근거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었다. 만약 전라도까지 적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순신의 수군도 발을 붙일 곳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이 서애 유성룡에게 보낸 서간에 ‘무호남無湖南이면 무국가無國家’라고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산도ㆍ안골포 승전의 큰 의미
이런 세가지 이유로 순신은 전군을 데리고 한산도를 떠나 전라좌수영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순신은 이번 싸움에서 사로잡은 우리나라 사람 몇몇을 다시 신문해 적정을 살폈다. 신문에서 나온 말을 종합해보니,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적의 수군이 세 패로 나누어 전라도를 침략, 패전한 치욕을 씻으려 한다. 그런데 한산도에서 73척이 부서지고, 3만명이 죽었다. 안골포에선 42척과 2만명이 수몰됐다.”

한산도, 안골포 두 싸움에서 적은 새로 조직한 수군의 세력을 크게 상실한 거였다. 전라도를 장악해 조선의 제해권을 잡으려던 계획도 물거품이 됐다. 그 때문에 평양에 웅거하던 소서행장의 군사도 더 이상 전진을 못했다. 일본군이 반쪽 어깨를 잃어버린 셈이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만일에 한산도 승첩이 없었다면 전라ㆍ충청도 이북으로부터 경기ㆍ황해ㆍ평안 제도까지 적군의 손바닥에 들어갈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명나라의 요동반도, 천진 산해관 및 산동 등지에도 일본 수군이 횡행했을 게다. 그렇다면 형세가 매우 위태하게 전개됐을 것이다.” 그 무렵, 일본의 태합 풍신수길은 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육전에서는 백전백승하여 무적이었지만 이순신의 함대를 만나선 9번 싸워서 9번을 패했기 때문이었다. 풍신수길은 그래서 일본 수군이 연전연패를 하는 이유를 알아오라고 엄명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수길에게 올라온 일본 수군 제장들의 보고서에는 이런 분석이 쓰여 있었다.
“병선의 다수多數로 보면, 일본의 적선이 조선 수군보다 3~4배 이상은 된다. 하지만 배가 취약해 이순신의 철갑귀선을 만나면 부딪혀 부서지기 일쑤다. 이순신이 사용하는 무기는 견고하고 편리할 뿐만 아니라 군사들도 굳세기 짝이 없어 조선의 육군과는 딴판이다. 용감히 싸워 물러나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있으며 또 이순신은 지리의 험이와 조수의 순역을 잘 알아서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그러므로 일본 수군으로서는 도저히 그 모략을 대항해내기가 어렵다.”
자세한 보고서를 받아본 수길은 이순신을 어찌 처치하나 탄식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그러던 수길은 조선에 건너가 있는 수군제장에게 명을 내렸다. “조선 수군이 싸움을 도발하더라도 응전하지 말고 부산포, 울산 장생포長生浦, 양산ㆍ김해ㆍ낙동강 입구의 험고한 항만 속에 함대를 감추고 수세를 취하고만 있으라.”
당쟁싸움이 빈틈으로 작용해
그리고 요시라의 헌책을 따라 조선 정부의 동서당쟁의 싸움이 있는 것을 이용하여 반간계(일반적으로는 둘의 중간에서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 술책)로써 이순신의 힘을 빼놓으라 가등청장과 소서행장에게 밀령을 내렸다. 당시 일본 제장들이 제일 두려워하고 피하려 하는 장수는 이순신 한 사람이었다. 이순신 한 사람만 없으면 나머지는 별 볼일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육지 각처에 있던 일본군들도 한산도와 안골포의 대패전의 소식을 듣고는 공포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부산, 울산, 양산강 등지로 적군 일부가 후퇴를 해 성채를 쌓고 집을 지었다. 오래 웅거하면서 때를 기다릴 준비를 했던 거다. 적군이 바라는 때는 이순신이 없어지는 날을 의미했다. 그 무렵 순신은 일본의 정세를 끊임없이 탐문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육지에 장수다운 장수가 없어 수륙으로 합공을 못하는 걸 심히 안타깝게 여겼다. 순신은 전라도 순찰사 이광에게 이 사정을 통지하였으나 이광은 용인에서 실패한 이래로 일본군을 무서워해 출정을 미뤘다. 더구나 장수 자격이 없는 이광을 군사와 백성이 따를리 만무했다. 이순신의 고심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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