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57)
의왕 행재소에 있던 선조와 군신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일본 수군이 순신 함대를 멸하고 서쪽으로 오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전라도사 최철견이 감사 이광의 명을 받아 좌수사 이순신이 견내량 한산도 사이에서 대승전한 첩서를 갖고 행재소로 왔다. 선조는 그제야 기뻐하며 한시름을 놓았다.

이 시를 읽은 순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탄식했다. “일본이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켜 이웃나라를 침략해 무고한 양국 백성을 죽게 하다가 필경엔 명나라의 출병이 있으리라는 뜻으로 이 시를 지어 수길을 원망하는구나!” 그 무렵, 한성에 남아 있던 일본 제장들은 이순신에게 또 대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면 순신은 전함대를 몰고 승전고를 올리며 예기당당하게 견내량 안바다로 돌아와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하지만 야밤에도 배 4~5척이 바다를 떠돌아다녔다. 낮에 공을 세우지 못한 원균이 바다에 떠다니는 적의 시체를 찾아 죽은 목이라도 베고 있었던 거다. 싸움이 끝나면 순신 모르게 조정에 공을 보고하자는 비루한 생각이었다. 조정에 원균을 진짜 장수로 알고 챙겨주는 이항복(서인), 이산해(동인) 같은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원균이 비루한 행동을 일삼고 있을 때 순신은 갑옷도 벗지 않은 채 잠을 청했다. 바로 그때 아득한 밤하늘에 기러기와 물새떼가 높이 떠 울며 날아온다. 순신은 돌연 일어나 북과 나팔을 울리도록 명命하여 삼군의 잠을 깨웠다. 또한 여러 장수를 자신의 배로 불러들여, 이렇게 당부했다. “적이 원래 속임수가 많다. 또한 금일의 패전을 보복하기 위해 우리가 잠든 틈을 타 야습을 할 듯하다. 다들 준비하였다가 응전하라.”

이순신은 그로부터 수년후 늦가을에 한산도 제승당에서 일수시를 지어 담담한 심사를 나타내니, 그 시는 이러했다. 명재 윤증이 시를 지어 추화追和하니 아래와 같다. “지금 나라의 남북 적 때문에 근심이 가득하나 수치를 아직 씻지 못하였다. 그러니 사람들이 장군을 그리는 마음은 오래되어도 다하지 않는다. 우리 같은 무리들은 무딘 칼일 따름이다.”
다시 한산도 승첩 다음날로 돌아와보자. 적군의 시체가 넘쳐났다. 한산도 부근에 사는 백성들이 그 수급을 베어 순신의 함대에 찾아와 바쳤다. 순신은 전라좌수영 대장으로서 경상도에서 벌어진 전투의 댓가를 받을 수 없어 해당 지방의 대장인 원균에게 주라고 일렀다. 수급을 좋아하는 원균은 좋아서 날뛰었다. 그중 일부는 순신에게 다시 바쳤지만 졸지에 전공이 이억기를 능가하는 수준까지 됐다.
한산도 승첩의 장계가 의주 행재소에 도달한 건 그로부터 10여일 후인 7월 하순께였다. 적막한 행재소에서 조선 군신들은 일본군이 밀려들어 오지 않나 마음을 졸이고 있던 때였다. “일본 수군이 남방연해에서 순신의 수군을 멸하고 서해를 오고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이때 전라도사 최철견이 감사 이광의 명을 받아 좌수사 이순신이 견내량 한산도 사이에서 대승전한 첩서를 갖고 행재소로 왔으니, 그 기쁨이 오죽 했겠는가. 후에 남파 홍우원은 이를 이렇게 시에 남겼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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