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총대장의 격노 “이순신에게 당한 건 수모”
日 총대장의 격노 “이순신에게 당한 건 수모”
  • 이남석 대표
  • 호수 130
  • 승인 2015.02.26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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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53)

이순신은 일본에서 대함대가 부산포 방면으로 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을 짐작한 이순신은 관하 제장들에게 전령을 내리고 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에게도 관문을 보냈다. 이런 내용이었다. “7월 7일 노량목에서 만나 적의 수군을 토벌합시다.”

 
평양을 점령한 소서행장, 종의지 등 일본 장수들은 많은 조선 사람을 매수해 밤낮으로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래서 행장, 의지 무리는 가만히 앉아서도 평양이북 각 군읍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었다. 소서군이 의주까지 쳐들어가지 않은 채 평양에서 지체한 건 구귀가륭의 무리가 통솔한 수군水軍 10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나라의 관문인 의주를 치면 명의 대군이 수륙으로 출동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렇게 된다면 조명 연합군과 싸우게 될 것이니 일본도 수륙군이 호응해 진격해야 요동지방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수군은 경상도 연해에서 이순신의 솜씨에 연전연패해 죽기가 바빴다. 그래서 일본 명호옥 본영에선 제2차로 대함대를 조선에 파송했다. 이는 이순신을 격파해 전라ㆍ충청ㆍ황해도의 바다를 손에 넣은 후 수륙군을 요동으로 진격시키겠다는 풍신수길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풍신수길은 조선의 해상권을 손에 넣지 못하고는 도저히 중원中原으로 진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수전水戰에서 이순신에게 연패를 당하자 분한 마음을 금하지 못했다.

그래서 풍신수길은 늘 “하늘이 어찌 나를 내고 또 어찌 이순신을 냈단 말인가”라며 한탄을 했다고 한다. 풍신수길이 10만이라는 대함대를 조직해 조선에 보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조선의 관문인 부산포를 포위해 이순신 함대를 섬멸하라는 엄명까지 내렸다.  사실 10만 수군 파병의 목적은 조선 8도의 바다를 지배하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이순신에게 당한 치욕을 갚아 일본장졸의 영혼을 위안하려는 풍신수길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한풀 꺾인 의지를 되살리려는 속셈도 있었다. 일본 수군이 이순신에게 연전연패하자 일본 열도에 극도의 불안감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풍신수길 자신의 위신에도 나쁜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경상 바다에서 날뛰는 일본군

물론 이순신이라면 이를 가는 장수도 있었다. 조선 왕궁을 차지한 적의 총대장 부전수가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부전수가는 ‘용병술이 귀신같다’는 평가를 받는 뛰어난 장수였다. 용병술로 재상까지 올랐으니,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 것 같다. 그는 “일개 이순신을 깨뜨리지 못함은 우리 일본군의 수치이니 이 수치를 어찌 씻지 아니하랴”며 이순신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 무렵, 이순신은 일본에서 대함대가 부산포 방면으로 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을 짐작한 이순신은 관하 제장들에게 전령을 내리고 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에게도 관문을 보냈다.

내용은 이랬다. “7월 7일 노량목에서 만나 적의 수군을 토벌합시다.” 하지만 7월 7일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일본군은 곳곳에서 출몰했다. 가덕에 적선 10여척, 거제 송진포 앞바다에 적선 30~40척, 남해도의 남단인 금산포錦山浦에는 심지어 적의 탐보선까지 나타났다. 조선 8도 중 7도는 적의 수중에 들어간 상태. 이제 남은 건 전라도 일대 하나뿐이었다. 이곳까지 적의 손에 들어간다면 조선의 강토는 없어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순신은 결심했다. “적의 수군이 전라도 이북의 바다를 지나지 못하게 하리라.”

하지만 일본 수군은 만만치 않았다. 이순신이 굳게 맹세를 했지만 경상도 연해 일대는 이미 유린당하고 있었다. 육로로도 전라도 북단인 금산錦山을 범했다. 의병장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이 방어사 곽영과 더불어 2일이나 싸웠지만 곽영의 관군이 먼저 무너져 달아나 버렸다. 이를 본 고경명은 분노했지만 둘째 아들 인후因厚와 함께 전사했다. 고경명의 부하장수 유팽로柳彭老, 안영安瑛의 군사들 역시 하나도 남지 않고 전사하였다(1592년 7월 제1차 금산전투).

고경명이 죽은 뒤에 충청도 의병장 조헌이 700명의 의사를 거느리고 의승장 영규의 승군과 합세, 금산의 적을 치려 하였다. 하지만 충청도 방어사 이옥李沃, 조방장 윤응린尹應麟 등이 연달아 무너져 의승장 영규가 홀로 적과 맞붙어 버티었다. 하지만 조헌도, 의승장 영규도, 그 700명의 의사도 모두 일본군에 무릎을 꿇고 죽었다[※ 참고: 1592년 8월 제2차 금산전투. 조헌은 의병을 일으켜 1592년 8월 1일 영규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했다. 18일에는 금산의 적을 협공하기로 호남순찰사 권율과 약속했다.

권율은 뒤늦게 작전을 바꿔 공격기일을 늦추자는 편지를 조헌에게 띄웠지만 받아보지 못한 채 출병한 조헌과 700명의 의사는 결전을 벌이다 전원 순절했다. 조헌의 호는 중봉重峰이니 백암 이순신과는 도의로 서로 인정하는 친우였다. 순신은 고제봉과 조중봉의 이 장렬한 전사 소식을 듣고 대노했다. 그래서 육로로 올라가 금산의 적을 치고 싶었지만 사방의 정세가 여의치 못하였다.]

일본군에 연일 대패한 조선군

1592년 7월 6일 아침 이순신의 병선 대소 90여척과 이억기의 병선 대소 80여척이 좌수영 앞바다에서 만나 노량으로 출발하였다. 이순신 함대의 승전으로 가덕 이서에는 적선의 그림자도 없었지만 한달이 채 안돼 전세가 역전됐다. 용인에서 이광 등 삼도 감사, 한강에서 이양원ㆍ김명원의 무리, 임진에서 신할ㆍ한응인의 군사가 패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적의 수군은 연전연패의 분을 씻기 위해 경상도 연해 각처에서 날뛰고 있었다. 마치 누구의 군사를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

▲ 조선 8도 중 7도는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조선 전국의 힘이 다 무너지고 선조의 좌우에 있는 신하들은 혼이 빠졌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명나라 조정에 구원병을 청하기 위해 애걸복걸하는 것뿐이었다. 아랫녘 한구석에서 일개 수군절도사인 이순신이 삼천리 조국을 두 어깨에 둘러업고 조정에서 알아주지도 아니하는 수전의 길로 떠나고 있었다. 실로 일국의 운명을 자기의 양 어깨에 지기에는 지나치게 낮은 직위를 가진 사람이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생명보다도 자기의 맡은 사명을 더 중히 여기는 책임감, 이것이 이순신으로 하여금 이 길을 떠나게 한 것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발행인 겸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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