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타이타닉❹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사실 그리 보기 힘든 가치가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의 최고지도자는 마오쩌둥毛澤東이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은 중공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 28세의 나이에 북한땅에서 전사했다. 그의 시신을 중국으로 송환하자는 사령부의 건의에 마오쩌둥은 “그 누구도 특별대우를 할 수 없다”며 결기를 발휘한다.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은 아직 북한 혁명능원의 일반묘지에 잠들어 있다.
미국 명문가이자 재벌의 아들이었던 케네디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 때 해군 조종사로 참전했다. 그가 탄 전투기는 격추됐고, 심한 척추 부상을 입은 그는 잠수함에 의해 가까스로 구조됐다. 그의 형 조 케네디 역시 2차 대전 참전 중 전사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남대서양의 섬 포클랜드 영유권을 둘러싼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 전쟁) 땐 엘리자베스 여왕의 둘째 아들 앤드류 왕자가 뛰어들었다. 포클랜드 탈환 작전에 참가한 그는 거의 결사대 성격을 띤 선발대를 태운 ‘인빈서블(Invincible)’호 갑판 제일 앞줄에 섰다. 영국군 장교로서 그는 ‘대영제국기’에 경례를 했고, 영국 국민은 감동했다. 전쟁 중 그의 실종 소식에 영국 국민은 비탄에 빠졌지만, 그가 생환하자 또다시 온 국민이 열광했다.
만약 타이타닉호와 같은 상황이 닥친다면 그들도 구겐하임이나 스트라우스, 혹은 애스토어 같은 희생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일등석 우리의 ‘라면 상무’나 ‘땅콩 부사장’이 이코노미석 승객에게 자신의 구명조끼를 양보할까. 이런 기대는 어쩐지 자신이 없다. 오히려 떠올리게 되는 건 ‘갑질의 종결자’ 칼의 모습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자선이나 시혜, 적선이나 동정이 아니다. 도덕적ㆍ윤리적으로만 기대되는 권장 사항도 아니다. 구겐하임의 마지막 말에 정확히 표현돼 있듯이 그것은 ‘가진 자가 마땅히 져야 할 의무’다. 사회적으로 더 많은 혜택을 누리는 만큼 공동체를 위해 더 많은 공헌과 희생을 해야 할 의무가 그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태생적으로 불완전하고 모순투성이인 자본주의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안전장치다. 안전장치가 없는 한국의 자본주의가 과연 지속될 수 있을까.
‘오블리주 없는 노블레스들(의무를 저버린 가진 자들)’ 때문에 우리 사회에 아직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민중민주주의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세력을 확보하고 있는지 따져볼 일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적은 급진좌경세력이 아니라 어쩌면 오블리주 없는 노블레스들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무책임함이 급진좌경 세력에게 양분을 공급한다는 반성이 필요하다.
김상회 한국폴리텍대학 안성캠퍼스 학장 sahngwhe@kopo.ac.kr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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