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 계급 허물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계급 허물다
  • 김상회 한국폴리텍대학 안성캠퍼스 학장
  • 호수 124
  • 승인 2015.01.08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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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타이타닉 ③

타이타닉 침몰 사고가 단순히 1500여명의 희생이라는 재난의 기록에 그쳤거나 계급의 비정함만 부각된 사건이었다면 그토록 오래 기억되지 않았을 것이다. 타이타닉을 읽는 또 다른 코드는 바로 1등석 승객들이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ㆍ사회지도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의 정신이다. 계급보다는 오히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타이타닉의 진정한 의미일지도 모른다. 

▲ 영화 ‘타이타닉’은 1등석 승객들의 위선을 풍자하는 동시에 그들의 영웅적 행동도 평가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캐머런 감독의 영화 ‘타이타닉’에서 계급은 전면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마치 숨은 그림처럼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 대중예술인 영화의 속성상 흥행을 위해선 가진 자들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이 그들을 옹호하고 칭송하는 것보다 당연히 유리하다. 밝은 소식만 전하는 ‘대한늬우스’를 돈 내고 볼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전체적으로 볼 때, 타이타닉호 1등석 승객 생존율이 3등석 승객보다 높았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타이타닉 승객들의 생사가 계급에 의해 갈린 것만은 아니라는 통계도 엄연히 존재한다. 대부분의 1등석 승객들은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약자를 우선 보호해야한다는 철학과 원칙에 따라 행동했다. 여자와 아이를 먼저 살리는 데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그 결과 생존한 여자 승객과 남자 승객의 비율은 9대 1이었다. 또 3등석 여자 승객들의 생존율이 1등석 남자 승객들의 생존율보다 오히려 높았다. 이는 마르크스나 베버의 계급이론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이다. 1등석에 탔던 상류사회 인사들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보여준 ‘원칙에의 복종’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우리에게 타이타닉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마치 동화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여자와 어린아이 지킨 1등석 승객들

벤자민 구겐하임. 그는 영화 속에서 의자에 가만히 앉아 브랜디 한 잔을 들고, 자신의 시종과 함께 타이타닉 최후의 순간을 지켜본 인물이다. 아비규환 속에 최후를 맞은 그는 스위스 출신의 미국 철강 재벌이었다. 뉴욕의 그 유명한 ‘구겐하임 현대 미술관’에 이름이 남아 있는 바로 그 구겐하임이다. 영화에서는 노인으로 묘사됐지만 사실 당시 구겐하임은 46세의 젊은 나이였다. 아마도 캐머런 감독은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던 구겐하임의 모습을 ‘살 만큼 산 노인’의 자포자기쯤으로 처리해 버리고 싶었던 건 아닐까.

아무튼 그는 ‘여자와 아이 우선’이라는 구명보트 승선의 원칙을 지켰고, 자신에게 순서가 돌아온 구명조끼까지 양보한다. 그리고 시종에게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신사답게 가라앉겠다”고 말한다. 만찬용 정장으로 갈아입은 그는 브랜디 한 잔을 들고 영화 속 모습 그대로 최후를 맞았다. 구겐하임은 배가 침몰하는 마지막 순간 시종에게 “아내에게 내가 나의 의무에 최선을 다했다고 전하라”는 유언을 전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또 한명의 인물이 있으니 바로 존 제이콥 애스토어다. 그는 타이타닉의 승객들 중 단연 최고의 부호였다. 그는 현재 뉴욕 최고의 호텔로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포함해 각국의 정상들이 뉴욕을 공식 방문할 때면 통상적으로 묵는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소유주이기도 했다. 당시 그의 아내는 구명보트에 올랐지만, 그는 구조의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영화에 그려진 것처럼 당대 최고의 부호인 그도 구명보트 승선 우선순위 700등에도 들지 못해 배의 난간을 붙잡고 밀려드는 바닷물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사돌 스트라우스는 당시에나 지금에나 여전히 미국 최대ㆍ최고의 백화점인 메이시 백화점 공동 소유주였다. 그는 아내 아이다와 함께 유럽에서 휴가를 보내고 미국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그 역시 ‘여자와 어린이 우선’이라는 원칙에 따라 그의 아내 아이다를 구명보트에 먼저 승선시켰다. 그러나 아이다는 남편에게 “당신과 함께하겠다”며 침몰하는 타이타닉에 남는다. 영화에서 선실 침대에 마주보고 누워 서로를 위로하며 최후를 맞는 잘 차려입은 노부부가 바로 이들이다.

▲ 벤자민 구겐하임, 존 제이콥 애스토어, 이사돌 스트라우스와 아이다(왼쪽부터) 등 1등석 승객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발휘해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먼저 살렸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주인공인 잭과 로즈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때마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네가 뛰어들면 나도 뛰어든다”는 대사는 짐작건대 캐머런 감독이 이들 부부의 마지막 대화를 차용한 듯하다. 이들 말고도 1등석의 내로라하는 많은 명사들은 그렇게 타이타닉호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그 내부의 모순과 그에 따른 무산계급의 저항으로 붕괴할 것으로 예언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주의로 완성되는 것이 역사적 필연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주의 전 단계로 자본주의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선 영국이나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가 붕괴하지 않는 게 오히려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예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실제로 사회주의 혁명은 오히려 러시아ㆍ중국 등 자본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국가에서 발생했다. 자본주의가 성숙한 서구사회에서 사회주의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힘 ‘노블레스 오블리주’

마르크스가 예언한 무산계급(혹은 피지배계층)의 극렬한 저항이 영국과 미국에서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타이타닉의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그중 하나라는 건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영국과 미국의 자본주의가 불평등의 모순과 그로 인한 내부의 불만을 완화할 수 있었던 건 사회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덕분이 아닐까. 
김상회 한국폴리텍대학 안성캠퍼스 학장 sahngwhe@kopo.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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