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㉜

적군이 이순신 함대를 보고 배에 올라탔다. 하지만 이순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바다 가운데로 나오지 않고 일자 모양으로 섰다. 일본 선봉 여섯척이 앞서 나오는 걸 확인한 순신은 북을 울려 치기를 명하였다. 하지만 우리군도 겁을 먹은 상태였다. 가장 앞에 있는 배 좌우척후장인 김완과 김인영이 머뭇거렸다. 그러자 후부장 정운이 분기를 참지 못하고 노군을 재촉하여 앞서 나아갔다. 일본군도 응전하여 화살과 조총을 쏴댔다.
정운의 배가 포위를 당한 것을 본 순신이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를 것을 명하며 나아가 싸우기를 재촉하니 일제히 풍우風雨처럼 달려들어 싸움이 벌어졌다. 단 원균의 배 한척만 먼 거리에 뒤떨어져 보고만 있었다. 순신의 모든 함대는 일제히 대완구, 불랑기, 천ㆍ현자 총통, 화전, 궁노를 발사했다. 그 소리가 산과 바다를 뒤집는 듯하여 순식간에 적선 10여척을 깨뜨려 불살랐다. 요란한 포성은 천지가 뛰노는 듯하고 검은 연기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일본군의 무기는 조총이 제일이요 그다음은 궁시였다. 하지만 우리 수군은 전쟁 처음부터 총통銃筒을 사용하였다. 총통이란 중량이 정철正鐵 200근인 천자天字총통, 정철 150근인 지자地字총통, 정철 50근인 현자玄字총통 등으로 이순신이 연구 개량해 거북선과 함께 만들어졌다. 이순신의 옥포전승첩(국왕에게 올린 장계)에는 총통의 파괴력에 대해 이렇게 언급돼 있다. “… 포와 활을 쏘니 빠르기가 바람과 우레 같았습니다….”
적군은 대패했다. 포탄에 맞아 배가 부서지고 화살에 맞아 죽고 화전과 불에 타서 죽고 물에 빠져 죽었다. 그 강하고 잘 싸운다는 일본군이 견디지 못해 남은 배를 끌고 한 줄기 혈로를 뚫고 꽁무니를 뺐다. 이 싸움에 패한 적장은 등당고호의 무리라 한다. 일본군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조선군은 싸우기도 전에 도망가던데, 의외로 강한 이순신의 군사가 있다.”
우리의 성과는 다음과 같다.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는 대선 1척을 깨뜨리고 적장의 수급을 베었다. 검은 갑옷과 관복으로 보아 장수의 것으로 판명하였다. 우부장 보성군수 김득광은 대선 1척을 깨뜨리고 포로가 됐던 조선 사람 1명을 구해냈다. 전부장 흥양현감 배흥립은 대선 2척을 깨뜨리고, 중부장 겸 선봉 광양현감 어영담은 중선 2척, 소선 2척 총 4척을 깨뜨렸다.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은 대선 1척을 깨뜨리고, 우부 기전통장(기병을 통솔하는 장수) 사도진군관 이춘李春은 중선 1척을 깨뜨렸다. 영남 제장 중에서 남해현령 기효근은 대선 1척을 깨뜨렸다.

이렇게 적의 병선 26척을 깨뜨렸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적의 대함대를 격파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바다 위 불타는 적선은 해가 지도록 불과 연기를 토하여 하늘을 가렸다. 적의 죽음도 부지기수였다. 살아남은 적군은 견디지 못하여 물에 뛰어들어 헤엄쳐 달아나거나 산으로 올라가 죽음을 간신히 면하였다. 순신은 활 잘 쏘는 몇개 부대를 상륙시켜 추격했지만 거제도巨濟島는 산로가 험할뿐더러 나무가 무성하였다. 날까지 저물었으므로 적을 약간만 소탕하고 후퇴했다. 1592년 5월 7일, 1차 출전 옥포 해전은 이렇게 끝났다.
승전한 곳에서 밤을 지내는 게 옳지 못하다고 판단한 순신은 영등포 앞바다로 배를 돌려 진을 치고 밤을 지내려 했다. 그 즈음 바다에 적의 대선 5척이 지나간다는 척후장의 보고가 있었다. 갑옷을 벗고 쉬려던 순신은 곧 제장에게 “적선을 추격하라”고 영令을 내렸다. 옥포싸움에 몸이 피곤했지만 승전에 기세를 얻은 장졸은 의기충천하여 함성을 지르며 적선을 쫓았다. 온 힘을 다해 도망쳐 적군들은 웅천 앞바다에서 병선을 버리고 육지에 뛰어내려 도망가 버렸다. 순신은 다시 명령을 내렸다. “싸운 자리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는 병가에서 삼가야 할 일인즉 곧 행선을 재촉하라.” 이순신은 함대를 몰고 창원昌原 지방 남포(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포리) 앞바다에 와서 진을 치고 순신이 전승을 축하했다.
옥포해전 이튿날은 5월 8일이다. 조반도 먹기 전에 진해鎭海 지방 고리량(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복리)이라는 데서 적선이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가 왔다. 순신은 곧 명령을 내려 함대를 두 부대로 나눴다. 동서로 행진해 양편으로 협공할 계획이었다. 저도(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의 한 섬)를 지나 고성지방 적진포(경남 고성군 당동리) 앞바다에 이르니 적의 병선 13척이 바다 어구에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적군의 반은 마을에 내려가 재물과 부녀를 노략질하고 반은 배에 남아 있었다.
순신의 배에서 북을 울려 나가 싸우기를 재촉하였다. 낙안군수 신호, 순천대장代將 유섭이 힘을 합쳐 적의 대선 1척을 깨뜨리고, 낙안군 급제 박영남朴永南, 보인(정규균을 돕는 경제적 보조자) 김봉수金鳳壽 등이 협력해 대선 1척을 깨뜨렸다. 화전과 천ㆍ지ㆍ현자의 대포의 위력이 다시 한번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적을 깨뜨린 후 아침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웬 사람 하나가 어린아이를 업고 산으로부터 울며 내려왔다. 무언가 하소연할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 사람은 순신의 앞에 와서 더욱 슬피 울었다. 아비가 우는 모습을 보고 등에 업힌 어린것도 울었다. 성명이 무어냐고 묻자 그 사람은 “적진포 근방에 사는 백성이옵고 성명은 이신동李信同이라고 하오”라고 답했다. 순신은 “그래 무슨 말이 있어서 왔는가”라고 물었다.
이신동은 이렇게 답했다. “사또께서는 주사(수군부대)를 거느리시고 멀리 오셔서 어제부터 거제도에서 적선 100여척을 깨뜨리시고, 웅천에서도 승전하였소. 여기 적진포 앞바다에서도 저렇게 완전한 승리를 하시고 하니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보는 대승첩이오. 소인이 오늘날까지 목숨을 부지하다가 우리 장수가 승전하는 모습을 보니 이런 기쁜 일이 어디 있소? 소인은 죽어도 여한이 없소. 대체 어떠하신 양반인가 한 번 뵈옵고 이런 하소연이나 할 생각으로 사또께 찾아왔소.” 그 모양이 하도 정성스럽고 측은해 보는 장졸들이 모두 감동했다. 하지만 순신은 냉정했다. 이신동의 말을 막고 적병의 행동을 탐문하기 시작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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