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통 털어 꿈 이룬 스몰 자이언츠
저금통 털어 꿈 이룬 스몰 자이언츠
  • 김미선 기자
  • 호수 0
  • 승인 2012.07.13 1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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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자본 창업에 성공한 전사 3人3色

단돈 500만원으로 창업전선에 뛰어들어 승승장구하고 있는 3인이 있다. 이들은 자신만의 취미와 특기를 살려 새로운 아이디어를 사업화하는 데 성공했다. 3인의 눈물 젖은 창업 스토리와 톡톡 튀는 성공 노하우를 들어봤다.

 

한동헌 마이크임팩트 대표
컨설팅그룹 때려치고 ‘마이크’에 풀베팅
창업 3년 만에 매출 30억원 올려 … “주커버그 섭외가 목표”

# 올해 5월 여의도 물빛공원에서 열린 청춘페스티벌에 김태호 MBC PD(무한도전 연출)가 등장했다. 김태호 PD는 무한도전 결방에 대한 설움을 토해내고 청춘에게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날 행사에서 SBS K-POP 스타에 출연했던 이승훈이 데뷔 무대를 치르기도 했다. 청춘은 열광했다. 페스티벌에는 무려 5000여명이 몰려들었다.

# 시기적으로 운이 좋았다. 외부 활동을 좀처럼 하지 않는 김태호 PD였다. 한동헌(31) 마이크로임팩트 대표는 김태호 PD를 찾아가 이 시대의 청춘에게 희망의 씨앗을 뿌려줄 것을 부탁했다. 김태호 PD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MBC 파업으로 자신이 연출하는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이 기약도 없이 결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태호 PD도 할 말이 많았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마이크’ 하나로 세상에 임팩트를 주고 싶은 한 대표의 꿈은 그렇게 무르익고 있었다.
 

 

세계적 경제석학, 강단에 세워마이크임팩트, 그리고 이 회사 CEO 한동헌.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진 않지만 업계에선 나름 유명하다. 한 대표의 이름만 듣고 무료강연에 나서는 이들이 많다. 마이크임팩트는 강연콘서트, 페스티벌, 파티 등 다양하고 독특한 강연 문화 행사를 기획·제작하고 있다. 현재까지 1000건이 넘는 강연을 진행해 3000명이 넘는 명사를 초청했다.

우리나라에 이런 회사가 있나 싶다. 웬만한 유명인사는 물론 해외인사까지 강단에 서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김중만, 박경철, 김제동 등이 마이크임팩트가 진행한 청춘페스티벌의 강연에 나섰다. 전 SBS 아나운서 윤영미 교수(명지대 초빙교수)가 마이크임팩트의 멘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해외 연사도 섭외하는 데 성공했다. 올 2월 「어떻게 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가」의 저자이자 미 펜실베니아대학교 와튼스쿨 교수인 스튜어트 다이아몬드의 강연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5월에는 「소유의 종말」 「공감의 시대」의 저자이자 경제석학인 제레미 리프킨의 강연을 진행했다. 새로운 강연도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오는 9월에는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교 교수이자 「중국이라는 거짓말」의 저자인 기 소르망의 강연을 진행한다. 10월에 열릴 예정인 하버드로스쿨 아시아 첫 종신교수 석지영의 강연도 마이크임팩트를 통해 진행된다.

마이크임팩트는 2010년 1월 설립한 벤처기업이다. 업력이 3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연매출은 30억원에 이른다. 신생 벤처기업이 낸 성과치고는 훌륭한 성적표다. 놀라운 점은 이 회사의 창업자금이 500만원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한 대표는 “이 일을 하게 된 건 운명 같았다”고 말했다.

2009년 초 대기업에 다니던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진 후 그는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스스로 가졌다. 그때 한 대표는 ‘누군가에 희망을 주는 일을 하자’ ‘이익을 좇지 말고 재미와 의미를 찾자’고 결심했다.그렇게 시작한 첫 프로젝트가 한 대표의 운명을 바꿨다.
 

 

2009년 3월 3명의 친구와 모여 강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모교인 고려대에 공병호(공병호연구소 소장), 유수연(유스타잉글리쉬 어학원 원장), 김태원, 션, 신해철, 노홍철(이하 연예인)을 연사로 섭외해 강연콘서트를 열었다. 후배들에게 청춘이 가져야하는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만원짜리 콘서트 티켓을 팔아 비용을 충당했다. 객석은 5000명의 관중으로 꽉 들어찼다. 대성공이었다. 그는 “운명이다 싶었다”고 회상했다.

그 해 6월 글로벌 전략컨설팅사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을 관뒀다. 다들 미쳤다고 했다. 웬만한 대기업보다도 연봉이 높았기 때문이다. 가족과 친구들도 잘 알지도 못하는 사업에 뛰어드는 그를 만류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서울시로부터 사무공간(3~5㎡)과 사무용 집기를 1년 동안 무상으로 지원받았다. 창업 아이템 개발비와 활동비로 매달 월 100만원도 지원 받았다. 각종 지원으로 그가 창업하는 데 들인 돈은 500만원에 불과했다.

핀잔 주던 사람들 지금은 “No.1”종잣돈은 적었지만 한 대표는 자신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꼭 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었다. 그러나 성공의 벽은 높고 가팔랐다. 당시는 강연콘서트의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연사 섭외가 쉽지 않았다. 그는 발품을 팔았다. 참신한 연사를 발굴하기 위해선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입소문이 났다.
 
‘한동헌이 진행하는 강연프로젝트’는 신뢰가 간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강의를 하고 싶다”며 먼저 연락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한 대표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 하루 3~4명 전화를 걸어온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미쳤다고 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하지만 한 대표는 어깨를 으쓱대지 않는다. “마크 주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리처드 브랜슨 버진그룹 창업자를 반드시 강연장에 세울 겁니다.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그는 마이크 하나로 세상을 울릴 준비를 끝냈다.

Issue in Issue
후배 창업가에게 전하는 당부
사업 아이템이 종잣돈보다 중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라.” 한동헌 대표는 “창업할 때 돈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돈이 되니까 나도 한다는 사고방식은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스스로 사명감을 가지고 뛸 수 있는 아이템을 찾는 게 관건입니다.” 사업아이템부터 찾으라는 조언이다. 다음은 그 사업을 어떻게 구체화하느냐다. 그는 “최근 정부에서 예비 창업자를 위한 다양한 제도를 마련하고 있다”며 “창업 초기 3년 동안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제도까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창업을 할 때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와 네트워크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고영선 스타애드 대표
전직 호텔 안내원, 인쇄업계 신화 되다
즉석명함 제작기술로 월 순이익 1000만원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작은 인쇄소. 그곳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었다. 동선이 간결했고 기다리는 손님들은 유쾌해 보였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복사기 소리는 시끄럽기보다 경쾌한 리듬을 타는 듯 했다. 10분 정도 지켜보니 답이 나왔다. 인쇄소 주인 고영선(51) 사장의 ‘웃음’이 행복 바이러스였다.고 사장은 업계에서 ‘창업 전사(戰士)’로 유명하다.
 

 

단돈 500만원으로 인쇄소를 창업한 그는 현재 월 2000만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순이익은 월 1000만원에 이른다. 열에 아홉은 먼지만 털고 나간다는 험악한 인쇄업계의 살아있는 신화다.동네 마트 인수했다 2억 날려하지만 그는 ‘전사’라는 별칭을 좋아하지 않는다. 500만원만 있으면 누구든지 창업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500만원 창업이요? 인터넷을 할 수 있는 PC와 전화기 한 대만 있으면 창업할 수 있어요.” 물론 단서가 있다. “왜 창업을 해야 하는가, 창업하면 남들보다 기가 막히게 잘 할 수 있을까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해요. 1~2년은 이 악물고 죽을 각오로 열심히 일하는 건 기본이죠(웃음).”소자본 창업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던지는 일침은 날카롭다. 회사 CEO가 된다는 게 상상만큼 달달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고 사장은 20대 때 장사를 시작했다. 첫 장사는 독서실 운영. 그의 나이는 겨우 28세였다. 장사가 생각보다 잘 됐고 덩달아 자신감이 붙었다. 1년 뒤인 1990년부터는 치킨집과 철제가구점을 동시에 경영했다. 꽤 큰 돈을 만졌다. 하지만 그는 장사운이 “30대 때 다했다”고 회상했다. 36세 때 망해가던 동네 마트를 무리하게 인수했는데 경영이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자고 일어나면 재고가 쌓이는데 피가 마르더라고요. 장사가 다 똑같지 하고 덤벼들었는데 하루하루 죽을 맛이었습니다. 지금도 지나가다 쌓여있는 물건을 보면 진저리가 쳐져요.” 죽어라 모은 재산을 날리고 2억이 넘는 빚만 남았다. 카드영업과 보험설계업으로 생계를 연명했다. 남들은 안정을 찾는 40대 때 그는 모든 걸 잃었다.

평온했던 그의 삶은 모래알을 씹는 것처럼 팍팍해졌다. 2002년 울며 겨자 먹기로 서울 명동 세종호텔에서 안내원으로 일했다. 돈을 벌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몸에 있는 ‘창업 DNA’는 계속 꿈틀댔다.그는 더운 여름날 우연히 충무로 인쇄거리를 지나치게 됐다. 그는 순간 “그래, 인쇄업이다. 다시 한번 기회가 왔구나”라며 쾌재를 불렀다.
 

 

인쇄업은 무엇보다 재고가 쌓이는 업종이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쏙 들었다.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 남들보다 인쇄물을 예쁘게 만들 자신도 있었다. 특히 영업은 그의 전공과목이었다.2008년 호텔 일을 그만두고 충무로에 입성했다.
 

10개월간 충무로 인쇄소에서 일하며 어깨너머로 실무를 익혔다. 하지만 핵심 기술 근처에는 못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안달이 났다. 그러다 힘겹게 모은 500만원의 돈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가맹비만 내면 무점포 명함 제작사 창업을 지원하는 전문업체를 알게 된 것이다.
 
가맹점이 명함 주문을 받아 본사로 전송하면 중앙공장에서 제작해 완성물을 배달해주는 방식이었다. 인쇄기술·디자인 등 실무교육도 받을 수 있었다. 차별화 포인트, 성공의 관건 “이거다 싶었죠. 또 사기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습니다. 그 길로 집에다가 사무실을 차렸습니다.” 무점포 창업이었다. 영업을 하는 만큼 수익이 떨어지는 구조.

그는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었다. “한 달에 500만원이 넘는 수익을 냈어요.  2년 반을 그렇게 일하자 단골 고객이 생겼고 작은 가게를 장만할 수 있게 됐죠.” 하지만 단꿈에 젖을 시간이 없었다. 오랜 경험으로 실패는 그림자처럼 가까이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명함 제작업체를 창업하자마자 그만의 무기를 선보였다. 배운 것을 응용해 30분 안에 명함을 만드는 기술을 선보였다. ‘즉석명함’으로 용인에서 일약 유명해졌다. 화려하거나 정교하지는 않지만 명함이 깔끔할 뿐만 아니라 저렴해 인기를 끌었다.

그는 “자영업의 경쟁력은 경기를 이겨낼 수 있는 차별화 포인트에서 나온다”며 “남들과 다른 걸 만들어 낸다는 것은 남들 보다 많이 알고 많이 움직였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자기만의 무기를 부단히 갈고 닦아 전쟁터로 뛰어들었으면 좋겠어요. 이 바닥 의외로 재미있어요!” 창업 전사는 오늘도 전장(戰場)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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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창업가에게 전하는 당부
“대박 환상부터 버려야 실패 안 해”
고영선 사장은 “많은 창업가가 대박의 환상 때문에 고꾸라진다”며 “거품이 빠져야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이 보인다”고 말했다. 어떤 업종이 돈이 될까보다 어떤 업종이 내게 맞을까를 먼저 고민하라는 조언이다. 그는 “소자본 창업이란 타이틀에 속지 말라”고 말했다. 머금기 쉬운 작은 사탕이 쉽게 녹는 것처럼 시작하기 쉬운 사업일수록 포기가 빠르다는 얘기다. 고 사장은 “창업 초기 수익은 위기 때를 대비해 무조건 비축하고 숨만 쉬며 1년을 버티라”고 말했다.“지난 일이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닌가”란 질문에 그는 “난 지금도 그러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 전사의 열정에 기자는 ‘전의’를 상실했다.

임소휘 한국종합공예협회 원장
작은 ‘초크’ 하나로 연 8000만원 벌어
거듭된 실패 딛고 초크아트 분야에서 성공 … 창업 전도사로도 맹활약

창업은 가시밭길과 같다. 창업가에게 실패는 그림자처럼 따라붙기 마련이다. 실패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성공의 관건은 누가 빨리 다시 일어나느냐다. 여기 수없이 많은 실패를 딛고 일어나 ‘500만원 창업’에 성공한 이가 있다.
 

 

임소휘(34) 한국종합공예협회 원장은 작은 초크아트공방을 운영한다. 2010년 6월 공방을 오픈한 임소휘 원장은 연간 8000만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그는 대학 졸업 직후인 2000년 새마을금고에 입사했다. 적성에 맞지 않아 6개월 만에 회사를 관두고 다시 무역회사 입사했다. 하지만 무역회사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표를 냈다.

“미래가 불확실했어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결혼을 하면 회사를 관둘 수밖에 없는 선배들을 지켜봐야 했죠. 부당한 대우였어요.”그는 창업을 꿈꿨고, 2006년 소원을 풀었다. 당시 개발 신도시로 주목 받던 용인 죽천에 2억5000만원을 들여 셀프 다이어트숍을 오픈했다.
 

하지만 첫 번째 도전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시장조사를 꼼꼼하게 하지 않은 게 패착이었다.시장조사 제대로 안해 실패 “죽천은 이제 막 분양을 시작하는 신도시였어요. 죽천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전세자금이 싸기 때문에 분당에서 내려와 살거나, 분양 받기 위해 대출받았더라고요. 여유가 있을 턱이 없었죠. 셀프 다이어트숍에는 도통 손님이 오질 않았어요.”

실패는 쓰라렸다. 그러나 그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 오기가 발동했다. 무엇을 해야 창업에 성공할 수 있을지 불철주야로 고민했다. 그러던 중 답을 찾았다. ‘잘 하는 것에 도전하라’였다. 임 대표는 자신이 좋아할 뿐만 아니라 잘하는 초크아트 기술을 이용해 창업을 하기로 했다.

그는 2002년부터 한국공예기능협회와 한국문화센터에서 초크아트(전임강사)를 가르쳤다. 초크아트는 오일 파스텔을 이용해 흑판에 그린 그림을 말한다. 레스토랑이나 카페, 제과점과 피부 미용숍의 메뉴판이나 벽화로 이용된다.두 번째 도전은 치밀하게 준비했다. 무엇보다 시장을 발품을 팔면서 꼼꼼하게 살폈다. 가능성이 엿보였다.
 

 

초크아트공방을 만드는 데 별다른 자본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아냈다.그는 사무실 보증금에 필요한 500만원을 가지고 창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그 때 깨달았어요. 돈을 목표로 창업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요. 본인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일을 해야 해요.”

그의 탁월한 손기술 덕분인지 초크아트공방은 금세 입소문이 났다. 도움이 필요한 고객을 직접 찾아다니며 영업을 한 것도 도움이 됐다. 전임강사 시절 인연을 맺은 수강생들은 든든한 지원자를 자임했다. 임 원장은 지금 예비창업자를 위한 인생을 살고 있다.
 
자신의 초크아트공방에서 관련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지난해 소상공인진흥원에서 실시하는 ‘소상공인 창업도우미업체’로 그가 운영하는 공방이 선정됐다. 초크아트기술 자격증을 주는 한국종합공예협회도 2010년 직접 설립했다. 정회원만 200명이 넘는다.

여기에서 자격증을 획득한 수강생은 약 400명에 달한다.그의 목표는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다. 창업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소자본’으로 창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는 창업가를 넘어 ‘창업 전도사’로 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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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창업가에게 전하는 당부
“마음 비우고 본인 역할에 충실해야”
“모든 일이 욕심만큼 이뤄지지 않는다”는 임소휘 원장은 “본인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욕심을 버리면 성공이 저절로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마음을 비우라는 얘기다. 그는 마지막으로 “우선순위를 정해 일을 하면 실수가 거의 없는 사업가가 돼 있을 것”이라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방관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김미선ㆍ정다운ㆍ이태경 기자 story@thescoop.co.kr | @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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