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⑳
선조 25년 1592년 4월 12일에 일본 함대가 잇달아 부산항 앞바다에 들어왔다. 바야흐로 임진란壬辰亂의 시작이었다. 그 이튿날인 4월 13일 새벽에 일본 선봉 소서행장이 부산 바다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700여척이나 되는 함대가 국경의 관문을 침입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 방어책이 없는 조선의 군정이란 실로 한심했다.

이런 기이한 징조를 받아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얻어냈습니다. 이미 천하를 크게 다스려 백성들이 부유하고 재물이 풍족하니 일본이 개벽한 이래로 오늘날보다 더 융성한 적이 없습니다. 사람의 생애가 100세를 넘기지 못하는데 어찌 답답하게 이곳에만 오래 있을 수 있겠습니까. 곧장 명나라에 뛰어 들어가 우리나라(일본국)의 풍속으로 400여주를 바꿔놓고 황제의 정치와 교화를 1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니 귀국(조선)이 앞장서서 입조한다면 내가 명나라에 들어가는 날 이웃나라의 맹약을 맺을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다만 삼국에 아름다운 명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보중하시기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수길은 받들어 답서합니다.”

두 사람 중 누가 옳은지 알 수 없던 선조는 여러 대신에게 판단을 맡겼다. 그랬더니 대부분 김성일의 말을 받들었고, 군비는 염두에 두지 말자 하였다. 선조는 “일본이 대명을 친다는 것은 가재가 바다를 버리고 육지로 오르려 함이요, 벌이 거북의 등을 쏘려 하는 셈이로다”며 일본의 이런 사정을 명나라 조정에 통지하자고 하였다. 하지만 영의정 이산해李山海가 반대하고 나섰다. 이런 이유에서였다. “일본이 이렇게 패망한 글을 조선에 보낸 것은 조선과 일본의 중개인들이 중국 모르게 왕래한 까닭이라 하여 대명이 되레 우리를 의심하기가 쉬울 듯합니다. 또 무슨 모함과 견책이 있을는지도 모르니 오늘의 일은 말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우의정 이양원李陽元, 이조판서 이원익李元翼, 병조판서 황정욱黃廷彧도 이산해의 말에 동조했다. 그런데도 좌의정 유성룡은 선조의 뜻을 찬성해 명나라에 통지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엇갈리는 통신사의 의견
이유는 이랬다. “일본 국서를 보고 중국에 알리지 않는 것은 도의에 맞지 않습니다. 만약 일본이 중국을 침범할 책모가 있다는 사실을 다른 나라인 유구琉球(류큐)로부터 듣는다 하면, 조선이 일본과 공모하였다는 대명국의 의심은 더욱 깊어질 게 뻔합니다.” 대사헌 윤두수尹斗壽가 유성룡의 의견에 찬동하였다. 선조는 유성룡, 윤두수의 말을 받아들여 김응남金應南을 상사上使를 삼아 명나라에 일본의 야심을 통지토록 했다. 그러자 ‘조선이 일본의 길잡이가 되어서 중국을 침범할 것이라는 유언비어’는 수그러들었다. 중국 조정 역시 선조가 보낸 국서를 보고 모든 의심을 접었다.
하지만 조선의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일본의 대군이 몰려온다’는 풍설이 낭자해 팔도의 인심이 물 끓듯 경동했다. 조정에서는 당시에 문무를 겸하였다는 김수를 경상감사, 이광李洸을 전라감사, 윤국형을 충청감사에 발령하여 남삼도 내의 성곽을 수축하며 군기를 준비했다. 군사를 모집함과 동시에 훈련도 시켜 불우의 변란을 능히 방어하도록 하여 두었다. 또 조정에서 신립을 대장, 이순신을 전라좌수사, 이억기로 우수사, 권율을 광주목사 겸 방어사에 임명하고 당대 맹장이라는 정발鄭撥로 부산첨사, 정운을 녹도만호, 황진黃進을 동복同福현감, 이운룡을 옥포만호에 임명하였다.

수길은 이런 대군을 친히 통솔하고 조선으로 떠나려했다. 이런 수길을 모친 대정소大政所(오만도코로)가 말렸다. “아서라. 너는 못 가리라.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느냐? 90세가 다 돼 죽을 날이 가까운 어미를 버리고 해외 귀역鬼域이란 조선으로 간다고 해서야 내가 잠시인들 마음을 놓을 수가 있겠느냐!” 수길은 노모의 만류를 거역할 수 없었다. 수길은 원정군의 본영을 비전肥前(히젠)국 명호옥名護屋(나고야)에 두기로 했다. 그리고 덕천가강 석전삼성石田三成(이시다 미쓰나리) 이하 모든 장수에게 명하여 출정군의 부대를 조직했다. 수륙군의 총합계가 15만9400명에 달할 정도로 대군이었다.
일본군, 저항 없이 부산진으로 진군
선조 25년 1592년 4월 12일에 일본 함대가 잇달아 부산항 앞바다에 들어왔다. 바야흐로 임진란壬辰亂의 시작이었다. 그 이튿날인 4월 13일 새벽에 일본 선봉 소서행장이 부산 바다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700여척이나 되는 대함대가 국경의 관문을 침입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 방어책이 없는 조선의 군정이란 실로 한심한 정세였다. 일본군은 아무 저항도 없이 부산진을 향하여 풍우 몰아치듯 진군하여 쳐들어왔다.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전진할 수 있었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일본군이 쳐들어오기 전날 부산첨사 정발은 절영도에 사냥을 나가서 자고, 아침에야 일본 부대가 상륙하였단 경보警報를 들었다. 정발은 타고 갔던 병선 3척을 끌고 급하게 돌아와서 성 위에서 바라본즉 일본 군사는 이상한 갑옷에 투구를 쓰고 조총과 창검 깃발을 들고 쳐들어왔다. 해마다 한번씩 일본배들이 장사하러 오는 전례가 있었지만 그것은 아닌 듯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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