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마리오’ 드라기의 도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마리오 드라기. 시중은행에 두차례에 걸쳐 돈을 풀었다. 민간대출을 확대해 시장(market)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돈은 시장으로 흐르지 않았다. 시중은행이 쟁여놓거나 중앙은행에 다시 예치했기 때문이다. 그런 드라기가 또 ‘돈’을 풀기로 했다. 디플레이션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서다. 무려 1조 유로에 달하는 돈이 쏟아질 것으로 보인다. 관건은 시중은행이 이 돈을 실물시장으로 퍼뜨리느냐다. 드라기가 이례적으로 시중은행을 압박하고 나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2012년 8월 중순. 유로존 안팎엔 ‘9월 위기설’이 나돌았다. 남유럽 재정위기의 뇌관을 터트린 그리스의 국고가 바닥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그리스가 긴축재정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유럽연합(EU)이 구제금융 지원을 중단한 게 부메랑이 됐다. 그해 8월 20일 만기인 31억 유로 규모의 유럽중앙은행(ECB) 채권을 갚아야 하는 그리스로선 벼랑에 내몰린 격이었다. 당시 재무부 차관이던 크리스토스 스타이코라스가 국영 NET 방송에서 내뱉은 말을 들어보면 당시의 절박함을 쉽게 엿볼 수 있다.

드라기의 결정은 국제금융시장에 활력소가 됐다. 국채매입의 대상국인 스페인 마드리드 증시와 이탈리아 밀라노 증시는 9월 21일 각각 4.91%포인트, 4.31%포인트 폭등했다. 영국ㆍ독일ㆍ프랑스 증시도 3%포인트 안팎으로 올랐다. 유로존뿐만이 아니었다. 뉴욕 다우지수는 2007년 12월 이후 최고 수준인 1.87% 올랐다. 일본 닛케이 지수, 홍콩 항셍지수, 한국 코스피지수도 2%포인트 가량 상승했다. 드라기 총재가 국제금융시장의 ‘구원자’ 역할을 톡톡히 해낸 셈이었다. 그의 별칭 ‘슈퍼 마리오’처럼 말이다.

유로존 인플레이션 역시 0.7%로, ECB의 목표치 2%를 크게 밑돌고 있다. 유로존이 디플레이션에 빠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확산되는 까닭이다. 실제로 IMF는 “2015년 유로존이 디플레이션에 빠질 확률이 25%”라고 전망해 기름에 불을 붙였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도 디플레이션 가능성까지 경고했다. “현재 세계경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요인은 지나치게 낮은 인플레이션이다. 유로존이 특히 심각하다.”

유로존의 마지막 지킴이 ‘드라기’
예상대로 드라기는 시장에 ‘돈’을 풀기로 했다. ECB는 6월 5일 통화정책회의에서 통화완화정책의 시행을 결정했는데, 핵심은 세가지다. 먼저 기준금리를 0.25%에서 0.15%로 0.10%포인트 인하하고, 시중은행에는 마이너스 0.1% 금리를 부과한다. 둘째, 시중은행을 대상으로 새로운 장기대출 프로그램(TLTRO)을 시행해 최대 4000억 유로를 빌려준다. 마지막으로 불태화不胎化 정책(ste rilization policy)을 포기한다. 시중에 풀린 돈을 국채매입으로 회수하지 않겠다는 거다. 이를 통해 풀릴 자금은 1625억 유로로 추정된다. [※ 참고: 불태화는 중앙은행이 본원통화의 증감을 막기 위해 채권을 매각 또는 매입하는 정책을 말한다. 살균소독이나 불임시술을 의미하는 sterilization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이번 정책에서 드라기의 속내를 고스란히 읽을 수 있는 건 ‘마이너스 예금금리’ 도입이다.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예치하는 자금에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이번 통화정책의 초점이 ‘실물경제 회복’에 있음을 시사한다. 시중은행에 빌려준 자금이 시장이 아닌 중앙은행으로 되돌아오면 ‘벌금’을 매기겠다는 정책이라서다. 그렇다면 중앙은행의 돈은 시중에 풀릴 수밖에 없다. 한 국제금융 전문가는 이렇게 평가했다. “드라기는 ECB가 썼던 1ㆍ2차 LTRO의 한계를 인식한 것 같다. 강력한 대출정책을 펴봤자 기업이나 가계로 유동성이 흐르지 않는 걸 주목한 거다. 그래서 시중은행에 ‘징벌적 금리’를 적용해 돈이 인위적으로 풀릴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했다. 실물경기를 회복시키기 위해 강력한 부양정책을 쓴 것으로 봐야 한다.”

드라기의 이런 압박정책에 국제금융시장은 긍정적인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독일 DAX 지수는 6월 6일(현지시간) 종가 기준 사상 최고치인 9987.19포인트를 기록했다. 장중 한때 1만 포인트를 넘어서기도 했다. 미국 증시도 비슷하게 흘렀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은 같은 날 종가 1949.44포인트를 찍었다. 이번 통화정책이 유럽을 넘어 세계경기의 확장국면을 지속시킬 거라는 기대감이 반영된 결과다.
드라기의 압박, 은행 꿈틀
우리로선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유럽경기가 회복되면 중국의 유럽수출이 늘어난다. 중국의 대유럽 수출비중은 17%에 달한다. 유럽이 경기부양을 하면 중국경제가 회복될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 수출기업에도 호재다. 한국의 가장 큰 수출지역이 중국이라서다. 이를테면 ‘유럽→중국→한국’으로 이어지는 경기선순환 효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물론 비관적 전망도 많다. 유로존의 시중은행들이 드라기의 구상대로 움직이진 않을 거라는 주장이다. 무엇보다 약삭빠른 시중은행이 0.25%라는 파격적 조건에 돈을 빌려가 가계나 기업에 실제로 대출을 할지는 지켜봐야 한다. 곽현수 연구원은 “자기 잇속만 챙기고 2년 후 상환해 버리는 얄팍한 수를 쓸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건전성 평가를 받아야 하는 시중은행들은 당분간 ‘부채정리(디레버리징)’에 초점을 맞출 게 불 보듯 뻔하다. 리스크가 있는 가계나 기업에 ‘돈’을 빌려줄 공산이 거의 없다는 비관론이 쏟아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찌 됐든 드라기는 ‘통화완화카드’를 꺼내들었고, 유럽경제는 꿈틀대고 있다. 벌써 ‘디플레이션 우려가 수그러들었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슈퍼마리오가 던진 주사위, 글로벌 경제판을 흔들고 있다.
강서구 더스쿠프 기자 ks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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