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통일한 수길, 조선을 탐하다
日 통일한 수길, 조선을 탐하다
  • 이남석 대표
  • 호수 96
  • 승인 2014.06.13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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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⑲

일본을 평정한 풍신수길은 다시 국외출병을 도모했다. 그러하여 천하제후들을 오사카성으로 불러들여 조선에 출병할 순서를 의논하고 대마도수 종의지를 통신사로 정하였다. 종의지는 관백의 국서國書를 받아서 자기의 부하 귤강광橘康廣(다치바나 야스히로)을 조선에 보냈다. 수길의 조선침략, 그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 풍신수길이 드디어 일본을 통일했다. 그의 눈이 국외로 쏠리기 시작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장종아부원친의 패전 소식을 들은 풍신수길은 20만 대군을 일으켜 구주로 출발하였다. 신속하기로 유명한 수길이지만 이번에는 천천히 나간다. 가다가 명승고적을 만나면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였다. 한달이 족히 흐른 뒤에야 가등가명加藤嘉明(가토 요시아키)의 수군과 합하여 태평사泰平寺(다이헤이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사납고 용맹하기로 유명한 도진의구 의홍 형제가 의외로 항복을 선언한다. 수길은 웃는 낯으로 항복을 받아들였다. 도진씨 형제의 인도로 지역을 두루 감상하던 수길은 대해를 바라보고 “저 바다의 건너편은 조선이지?”라고 물었다. 도진 형제는 “글쎄요. 조선이 될지 명나라가 될지…”라고 답했다. 이 지방에는 조선의 반민(나라를 배반하고 도망친 백성)이 들어와 살고 있었는데, 그중 한명이 요시라(훗날 소서행장 휘하의 통역관 노릇을 함)였다. 수길은 요시라를 불러들여 조선의 사정을 묻는다. 먼저 조선의 국정을 알고자 함이었다.

요시라는 이렇게 말했다. “조선은 삼천리 강토에 팔도강산이며, 내직으로 3000, 외직으로 800의 관직이 있습니다. 조정의 정치상황은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하여 소위 국방의 대비란 것은 보잘것없습니다. 문신배들은 왕실의 계승문제이니 폐비사건이니 하는 일들로 당파 싸움을 일삼고, 군정 같은 것을 꼬집어 말하는 이가 없습니다.” 수길은 요시라에게 상을 내리고 “이번 길에 구주를 얻은 것보다 조선의 사정을 알고 가는 것을 반갑게 여기노라”고 말하였다.

수길이 구주에서 돌아와 천황을 모시고 취락聚樂(주라쿠ㆍ1586년 교토에 건축한 궁성)에 행차하니 천황의 거동은 수백년간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길이 거동 길을 차린 건 황실을 잊어버린 제후에게 황실의 존엄한 도리를 알리려 함이었다. 천황의 봉련(봉황을 장식한 임금의 가마)이 취락에서 5일간 머물렀는데 관백 수길이 정성을 다하여 시종하였다. 그후 수길은 다시 관팔주로 출병하였다. 관팔주는 태평원의 기름진 평야 300만석을 차지하여 50여성의 영토 중의 번화한 도시가 많았다. 수길은 27만의 대군을 일으켜 수륙 두길로 진군하였다. 천황이 하사한 절도를 차고 나섰다. 불과 100일만에 40여성을 함락하고 북조씨의 도성인 소전원小田原(오다와라)성을 포위했다. 덕천가강이 북조씨를 구슬려 천하대세가 변하고 있음을 알렸다. 가강의 말에 귀가 열린 북조씨정北條氏政(호조 우지마사) 부자는 소전원성 밖에 나와 항복하였다.

엄동설한에 적진 정면 돌파

관팔주라 자랑하던 58성 88관의 영토가 수길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수길은 북조씨직北條氏直(호조 우지나오)을 협산挾山의 일만석 영토를 내어주고 수길은 이번 걸음에 오우 지방까지 마저 치기로 하였다.수길은 관팔주에서 병사를 움직여 바로 강호江戶(에도)로 향하여 쳐들어간다. 오우의 영주는 이달정종伊達正宗(다테 마사무네)이었다. 이달정종의 군사가 한바탕 맹렬히 대항했지만 수길의 대군 앞에서 어쩔 수 없었다. 이달정종이 우도궁宇都宮(우쓰노미야)성 밖에 항기를 꽂고 머리를 숙였다. 수길은 친절한 대우를 하였다.

수길이 일찍이 오사카 대판大阪에 근거지를 잡은 뒤에 구주에서부터 정벌을 시작, 오우 지방에 이르기까지 일본 전토 60여주를 석권했다. 다른 소소한 제후들도 모두 항복하였다. 수길이 제장들을 분봉하되 먼저 직전신웅에게 오주 추전秋田(아키다)의 100만석 영토를 주고 덕천가강에게는 관팔주 70만석 영토를 하사했다. 나머지 제장들도 각각 영지를 그 공로에 따라 분봉하여 주었다.

 
일본국내를 평정한 풍신수길은 국외출병을 도모했다. 그러하여 천하제후들을 오사카성으로 불러들여 조선에 출병할 순서를 의논하고 대마도수 종의지를 통신사를 정하였다. 종의지는 관백의 국서國書를 받아서 자기의 부하 귤강광橘康廣(다치바나 야스히로)을 조선에 보냈다. 그 국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듣건대 중원 명나라에는 소인배들이 일을 맡아 나라의 운세가 이미 다하였으니, 귀국 조선이 일본을 위하여 길을 인도하는 선봉이 돼 일본과 합세하여 400여주의 중국을 정복하고 천하를 나누자.”

일본 국서를 받은 조선의 선조는 2품 이상 관리를 명하여 답서를 하여 보냈다. “뱃길이 어두워서 답례 사절을 못 보낸다.” 답서를 본 수길은 대노했다. 나라가 모욕을 받았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조선에 갔던 귤강광의 목을 베고 종의지를 불러 “자네가 가라”고 엄명을 내렸다. 수길의 부하 평조신과 중 현소에게도 함께 가라 했다. 선조 21년 무자 1588년 4월에 일본사신 종의지 등이 와서 공작 한쌍, 조총과 창, 칼 등을 헌납하니 조정이 이조정랑 이덕형으로 접대하게 하였다. 이덕형은 종의지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전년에 손죽도 싸움은 조선의 반민 사화동이 일본에 들어가 왜병을 인도해 침략한 것이다. 그 반민을 잡아 보내면 그 연후에 통신사를 보내겠다.” 종의지는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오”라고 답하면서 수길의 부하 평조신을 일본으로 보냈다. 수길이 구주 일대에 흩어져 사는 조선의 반민 사화동, 신삼보라信三甫羅, 긴시요라緊時要羅 등 160여인을 잡아 보냈다.

기축 1589년 9월에 반민 사화동과 김대기金大璣, 공대원 등이 일본으로부터 압송돼 조선으로 왔다. 조선은 해적을 인도해 연해 변진을 약탈한 죄로 사화동을 처참하고, 다른 이들은 폭풍을 만나 해상에서 표류됐다고 해 풀어줬다. 공대원은 이순신의 부하가 되었다.

조선 침략 야욕 불태우는 수길

▲ 풍신수길의 국서를 받아본 선조는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조정에서 종의지 등에게 공으로 상과 음식을 내렸는데, 종의지는 조선의 답례사절을 계속해서 청했다. 조선은 1590년 3월에야 사신 파견을 결정했다. 유성룡, 변협 등이 “사신을 파견하여 답례함이 말썽이 없을 것이요, 또한 저들의 동정을 살펴보고 오는 것도 옳다”고 거듭 주장했던 게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병조첨지 황윤길(무변 서인)을 통신정사, 성균사성 김성일(문신 동인)을 통신부사, 홍문전적 허성許筬을 종사관으로 삼아 종의지 등과 함께 일본으로 보냈다. 수길이 조선의 국서를 받아 읽어보니 교묘하게 글치레뿐이었다. 수길은 “내가 조선의 글솜씨를 보자는 것은 아니다”고 말한 뒤 회답문을 써 황윤길의 일행을 돌려보냈다. 수길의 글은 이러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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