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기술, 나아가 항공산업이 발달하기 위해선 학자ㆍ엔지니어ㆍ테스트 파일럿과 같은 항공 기술인의 열정과 희생이 필요하다.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과 관심이 뒷받침돼야 함은 물론이다. 미국인들은 지금도 라이트 형제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국인으로 꼽는다.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03년 12월 17일 미국 동부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키티호크 해변가 모래 언덕. 자전거 제조업자이자 아마추어 항공 엔지니어인 윌버와 올빌 라이트 형제가 직접 연구ㆍ설계ㆍ제작한 1인승 동력기인 ‘The Flyer(더 플라이어)’ 1호기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된 동력 비행기 개발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한 순간이었다. 세계 1ㆍ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항공기 속도의 중요성을 깨달은 미국과 유럽의 열강들은 정부 주도로 항공기 속도 올리기에 주력했다.
‘음속’을 돌파하라
하지만 당시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소리 속도(음속ㆍ音速)는 마의 장벽’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음속 돌파라는 극한 기술을 먼저 보유하는 국가가 하늘을 소유해 다음 세대를 지배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1920년대 독일에선 초음속 이론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미국 NACA(NASA의 전신) 랭리 연구소도 1927년 상당히 빠른 속도의 아음속 풍동을 개발했다. 1930년 초반 독일에선 실용적인 초음속 동풍이 개발됐다. 하지만 대부분 속도가 음속에 가까워지면 항력이 급격히 증가한다는 이론적 연구결과뿐이었다. 인간은 절대로 초음속(마하1) 비행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성급히 결론짓는 사람도 많았다.
그럼에도 영국의 제프리 드 하빌랜드는 1946년 9월 27일 직접 설계ㆍ제작한 ‘D.H.108 Swallow’기를 몰고 음속 돌파 기록에 도전한다. 그러나 마하 0.8을 넘지 못하고 비행기가 파괴되면서 그는 ‘음속의 벽’에 의한 첫번째 희생자가 된다. 영국의 국가적 영웅이며 세계 항공기 발달사에 화려한 업적을 남긴 위대한 항공 기술인이 그토록 사랑했던 하늘에서 산화한 것이다.

오전 10시 26분 마하 0.32의 속도로 B-29에서 떨어져 나온 XS-1은 수분 후 4만3000 피트 상공에서 마하 1.06을 기록한 후 14분 만에 무사히 착륙했다.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물리학자인 마하 박사가 1887년 초음속으로 날아가는 총알의 충격파를 촬영한 후 60년 만에 인류 최초의 초음속 비행에 성공한 것이다. 미국이 세계 최고의 항공우주 기술력으로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서막이 오른 순간이었다.
일반인의 눈에는 대수롭지 않은 짧은 비행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음속 돌파 시 조종불능상태에 빠지거나 기체가 파괴돼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조종석에 오른 척 예거의 투혼은 그를 국가적 영웅이자 세계 최고의 테스트 파일럿으로 만들었다. 또한 그가 착륙 직후 작성한 비행 보고서는 항공기 발달사에 길이 남은 이정표가 됐다.
항공산업의 성장요건
이렇듯 항공기술, 나아가 항공산업이 발달하기 위해선 학자ㆍ엔지니어ㆍ테스트 파일럿과 같은 항공 기술인의 열정과 희생이 필요하다.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과 관심이 뒷받침돼야 함은 물론이다. 미국인들은 지금도 라이트 형제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국인으로 꼽는다. 그뿐만 아니라 두 형제가 첫 비행에 성공한 키티호크 언덕은 1961년 항공모함 ‘키티호크’호로 되살아나 2009년 퇴역할 때까지 48년간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조진수 한양대 교수 jscho@hanyang.ac.kr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