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기술은 ‘착한 기술’로 불린다. 인간 중심의 지속가능한 기술을 표방해서다. 물통을 굴려 이동하는 ‘큐드럼’, 오염식수를 정화하는 ‘라이프 스트로’ 모두 착한기술이라고 할 만하다. 그렇다고 적정기술이 꼭 알찬 열매만 맺는 건 아니다. 부작용만 양산하는 경우도 있다. 착한 기술에도 ‘비즈니스 마인드’가 필요하다.

헨드릭스는 밀도가 낮고 강도가 강한 선형저밀도폴리에틸렌(LLDPE)을 사용해 지름 50㎝, 높이 36㎝ 크기의 물통을 제작했다. 용량은 50L로 제한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그 유명한 ‘큐드럼(Q-Drum•1993)’이다. 물통의 모양이 알파벳 ‘Q’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큐드럼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대단했다. 간단한 디자인으로 인간에게 적합한 제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산업디자인의 힘을 보여준 사례라는 평가도 받았다. 하지만 큐드럼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약 6만원에 이르는 가격이었다. 큐드럼이 필요한 사람들이 저개발국 저소득층 사람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결국 큐드럼은 기부를 통해 제품이 공급될 수밖에 없었다.
큐드럼은 착한 실적만 냈나
# 큐드럼과 함께 대표적인 적정기술로 언급되는 제품은 ‘라이프 스트로(life straw)’다. 국제연합(UN)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 약 10억명의 인구가 안전한 식수를 먹지 못한다. 이들이 오염된 식수를 마시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마을엔 우물이 없어 물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런데다 지하수마저 가축 배설물로 인해 오염됐다. 20초마다 어린이 4명이 말라리아ㆍ콜레라 등 수인성 질병으로 사망하는 이유다.
이런 상황을 주목하는 이가 있었다. 적정기술 제품 생산업체 ‘베스트가드프란젠’의 CEO 미켈이었다. 미켈은 수인성 질병을 예방하고, 가족과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적정기술 제품 ‘라이프 스트로’를 개발했다. 스트로 안에 필터가 있어 물을 빨아들임과 동시에 정화된다. 작은 빨대 하나로 깨끗한 식수를 먹을 수 있게 된 셈이다.

한윤식 한동대(전산전자공학) 교수는 “큐드럼과 라이프 스트로는 적정기술의 가능성과 한계를 뚜렷하게 보여준 제품이다”고 평가했다.
큐드럼과 라이프 스트로는 적정기술의 대표적 사례다. 여기서 보듯 적정기술엔 거대한 함의含意가 들어있지 않다. 그렇게 무거운 용어도 아니다. ‘착한기술’ 쯤으로 해석하면 된다.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언제든 누구나 적용할 수 있는 쉬운 기술로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술이다.”
적정기술은 처음 언급한 이는 영국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다. 1965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회의에서 슈마허는 적정기술의 원조격인 ‘중간기술’을 제안했다. “중간기술은 대중에 의한 생산기술이다. 개발도상국의 기술보다는 우수하지만 선진국의 거대 기술보단 값싸고 소박하다는 의미에서 중간기술이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한편에선 ‘중간기술이 열등하거나 저급기술인 것처럼 오해받을 수 있고, 기술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우려를 표명했다. 그 대안으로 제시된 개념이 바로 ‘적정기술’이다.
큐드럼이나 라이프 스트로처럼 적정기술은 제3세계나 저개발국을 환하게 밝혔을 것만 같다. 취지도 착하고, 기술도 착하니 이보다 더 좋은 ‘공헌’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적정기술이 꼭 ‘착한 실적’을 낸 것은 아니다. 부작용만 양산한 적정기술도 있었다. 사례를 보자.

그로부터 몇년 후. 지역 주민들에게 보급된 ‘무상 모기장’이 닳고 찢어진다. 모기장을 새롭게 설치해야 하지만 모기장 생산업체는 망하고 없다. 모기장을 구하지 못한 지역 주민들은 또 다른 할리우드 스타가 모기장을 기부해주길 바란다. 기약 없는 손길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실제 사례다. 글로벌 디자인 기업 IDEO의 CEO인 팀 브라운은 아프리카 가나에 방문했다. 모기장이 무료로 보급된 지역을 여행하던 그는 얼마 전 말라리아에 감염됐다는 여성을 만났다.
부작용만 양산한 적정기술도 있어
그녀에 따르면 지역보건소를 통해 배포된 모기장은 금세 동이 났다. 무료 모기장이 보급된 이후 지역 상점들은 모기장을 취급하지 않았다. 애써 모기장을 들여놔도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익에 타격을 받은 모기장 생산업체는 문을 닫았다. 선의로 시작한 무상보급이 현지의 지역경제를 교란한 셈이다.
말라리아로 인한 피해를 막는 방법에서도 동일한 양상이 나타났다. 개발도상국에서 발생하는 말라리아 감염은 지금도 심각한 문제다. 세계보건복지기구(WHO)에 따르면 2006년 한해동안 전세계적으로 약 2억5000명이 말라리아에 감염됐고, 그중 100만여명이 사망했다. 충격적인 것은 사망자의 90%가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발생했고 대부분이 5세 미만의 신생아였다는 점이다.

팀 브라운은 저서 「인간중심 디자인 툴킷」에서 “적정기술 제품을 제조하고 출시할 때는 제품의 형태나 기능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유통할 것인지에 대해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에는 경제학자 윌리엄 이스터리가 쓴 「백인의 의무(White Man’s Burden)」에 소개된 아프리카 말라위의 사례를 살펴보자. 말라리아 모기장을 보급할 예정인 한 비정부단체(NGO)는 오랜 회의 끝에 모기장을 유상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농촌 지역에서는 보건소를 통해 개당 50센트를 받고 팔았다. 모기장이 판매될 때마다 개당 9센트의 수익이 보건소 직원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직원들은 말라리아 위험에 취약한 산모와 아이들의 부모에게 모기장 구입을 적극 권했다.
반면 말라위 수도인 릴롱퀘에서는 모기장을 개당 5달러에 판매했다. 도시에서 거둬들인 수익으로 농촌 지역에서 모기장을 싸게 팔 생각을 한 것이었다. 이 시도는 놀라운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2000년 8%에 불과했던 아동(5세 이하)의 모기장 이용률이 2004년 55%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말라위 프로젝트’의 결과다. 이 프로젝트는 비즈니스가 밑바탕에 깔린 ‘모기장 유통모델’을 적용했고, 알찬 열매를 맺었다.
말라위 프로젝트의 성공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제아무리 기능이 좋고 수요가 확실한 적정기술 제품이라고 할지라도 무상보급전략으론 지속가능한 효과를 유발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잠비아 출신 경제학자 담비사 모요는 저서 「죽은 원조」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기장 10만장을 외국에서 수입해 들여오는 것보다 현지 생산업체가 생산할 수 있도록 재정을 지원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공적개발원조가 아프리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되레 악화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이는 수많은 적정기술 제품이 그동안 비즈니스로 전개되지 못한 것과 관련이 있다. 세가지 측면에서 요인을 살펴볼 수 있는데, 첫째는 적정기술을 추진할 때 단기적인 성과에 급급한 나머지 유통 방안을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정해진 짧은 기간 내에 적정기술을 기획하고 개발해 현지에 전달하고 결과를 보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유통방안을 마련할 여유가 없다. 설사 유통 방안을 생각한다고 해도 적정기술 프로젝트를 진행한 후 후속조치로 마련하기 일쑤다. 적정기술 기획단계에서 유통방안을 마련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비즈니스 전문가의 참여가 중요한 이유는 기술력만으로 비즈니스를 이끌어가기 어려워서다.
더욱이 인간 중심의 적정기술은 엔지니어와 비즈니스 전문가뿐만 아니라 디자이너, 개발협력 현장 전문가, 현지 커뮤니티 대표, 비즈니스 전문가 등 다양한 전문인력이 필요하다. 근본적으로 인간을 이해해야 비즈니스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얘기다.
마지막 실패요인은 NGO, 개발협력기관, 기업 간의 파트너십을 추진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의 부재다. 적정기술을 현지에서 활용할 때 다양한 기관과 상호협력을 맺는 것은 필수다. 기업, 연구소, 현지 NGO, 현지 제작업체, 컨설턴트 등이 오랜 기간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필요한 적정기술
네덜란드 전자기업 로얄 필립스가 인도에서 선보인 적정기술 제품 ‘출라(chulaㆍ화덕)’는 다양한 인력이 파트너십을 형성해 성공을 거둔 사례다. 로얄 필립스는 2005년 인도의 전통 화덕을 대체할 출라를 기획했다. 화덕에서 나오는 연소가 건강에 악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2007년 출시를 목표로 5개월간 전문가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섣불리 제품을 출시하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댔다. 현지 NGO, 기업가, 커뮤니티 대표, 제작업체 등과 함께 워크숍을 개최했다.
이들 사이에 신뢰감이 형성되기 시작한 건 그 이후였다. 로얄 필립스가 현지의 다양한 변수를 감안해 현지인의 개선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NGO 역시 제품을 만들어 기부하는 형태에서 벗어나 현지 기업가를 육성하고 제품을 보급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수립했다.

그동안 많은 적정기술 제품이 기술적인 접근에서 시작하는 오류를 범했다. 기술이 현지에서 어떻게 활용될 것인가에만 골몰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회사는 기술적으로 구현이 가능하더라도 상품을 만들어 출시해선 안 된다. 사용자의 니즈, 시장상황, 상품을 지속적으로 제조하고 유통시킬 수 있는 탄탄한 비즈니스 계획을 수립하는 게 먼저다. 적정기술 제품도 결국은 비즈니스의 영역이다.
김건희 기자 kkh479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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