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란’은 ‘장난’이다. 장난 삼아서 해보는 가운데 생각지도 못한 위대한 작품이 탄생한다. 장난치다 보면 재미가 있어지고 재미있게 장난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전과 다른 시도를 즐기게 된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는 ‘작란作亂’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작란은 말 그대로 난동(亂)을 일으키는(作) 것이다. 난동亂動은 기존의 당연한 것, 상식과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지고 시비를 걸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활동이다. 문제아의 소행이자 작태作態라고 할 수 있다. 문제를 일으키는 문제아가 변화를 주도하고 새로운 문명을 창조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이제까지 접해보지 못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색다른 답을 찾는다. 사람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과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사람으로 대별된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모든 것을 호기심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자기만의 문제의식을 가지려고 노력하지만,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사고 논리에 갇혀 어떻게 하면 보다 효율적으로 주어진 문제를 풀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런데 ‘작란’은 ‘장난’이다. 장난 삼아서 해보는 가운데 생각지도 못한 위대한 작품이 탄생한다. 장난치다 보면 재미가 있어지고 재미있게 장난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전과 다른 시도를 즐기게 된다. 축음기ㆍ영사기ㆍ백열등을 발명한 에디슨, 세계에서 가장 많은 것을 만든 발명가로 1093개의 발명품에 대한 특허를 얻었던 에디슨은 호기심으로 무장한 발명왕이었다.
달걀을 품어 병아리를 만들어 보겠다는 호기심어린 ‘장난’이 오늘날의 에디슨을 전대미문의 발명가로 만든 ‘작란’이었다. 장난치는 가운데 창조의 싹이 자라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는다. 장난의 시작은 호기심이다. 심리학자 칼 융은 ‘창조는 놀고 싶은 유희의 충동 속에서 생겨난다’고 했다.
“놀이는 인간의 생리적 본성을 넘어선다”고 말한 「호모 루덴스」의 저자, 요한 호이징하는 “법과 질서, 상업과 이윤, 공예와 예술, 시, 지혜, 그리고 과학이 문명생활의 원동력이다. 이 모든 것이 놀이라는 태고의 흙속에 뿌리박고 있다. 순수한 놀이는 문명의 중요한 토대 중의 하나”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생각하는 호모 사피엔스에 갇혀 있던 인간인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의 본성이 밝혀지면서 창조의 시원에 대한 의문이 놀이를 통해서 이뤄짐이 밝혀지고 있다. 놀이야말로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이다.
하노버 출신의 독일 동화작가, 본 랑에(Von Lange)는 “놀이는 어린 시절의 예술이고, 예술은 성숙한 형태의 놀이다.” 예술적 창작의 근저에는 언제나 어린이의 놀이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어린이들의 놀이를 통한 창작의 세계가 제도화된 공식 교육을 받으면서 점차 길들여지면서 사라진다는 점이다.
“지금은 내가 원하는 대로 칠할래요. 학교 가면요, 거기서 원하는 대로 칠해야 하잖아요.” 미국의 4살짜리 어린이가 한 말이다. 피카소가 ‘어린아이처럼 그리는데 50년이 걸렸다’고 한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다중지능의 창시자, 하워드 가드너는 교육받지 않은 마음(Unschooled Mind)이 창조성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어린이는 어른들의 제도화된 교육을 받으면서 동심을 잃어간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마음이 동심이요, 동심이 바로 무한을 상상하는 순진무구, 천진난만한 창조성의 원동력이다. “노는 방법을 배울 때처럼, 서로 관련 없는 성질을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방법을 배우는데 있어서도 개개인은 어린 시절에 자연스러웠던 기술들을 어른으로서 재학습하게 된다.” 케임브리지 창조공학 그룹의 윌리엄 고든의 말이다.
상상력의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명언, “가장 위대한 업적은 ‘왜’라는 아이 같은 호기심에서 탄생한다. 마음 속 어린아이를 포기하지 말라”를 명심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의 영혼 안에는 요정이 살고 있다. 그 요정을 어른들의 고정관념과 타성의 옷으로 덧씌우는 순간 동심은 상심하고 상상력의 날개는 부러지며 창조의 신천지로 가는 문은 영원히 닫힐 것이다.
유영만 한양대 교수 010000@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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