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진의 생각하는 골프
골프에서의 승부는 나의 나이스 플레이가 아니라 상대방이 무너져 주는 데 있다. 막판 승부는 ‘누가 마음을 더 잘 다스리는가’에서 갈린다. 마인드컨트롤, 생각하는 골프의 해답이다.
1998년 8월 영국 로열 리담&세인트 앤즈 골프코스에서 열렸던 여자브리티시오픈 때 일이다. 이미 상반기에 4승을 거둬 데뷔시즌에 올해의 신인상은 물론 상금왕까지 거머쥐는 신화에 도전하고 있는 박세리에게 세계골프 언론이 집중됐다. 개막 전날 가진 인터뷰 가운데 박세리는 “골프가 재밌다. 난 이번 대회에서 골프 게임을 즐기겠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현장에 있었던 필자는 박세리의 말이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프를 즐긴다’는 게 누구로부터 시작됐는지는 모르겠으나 골프 선수의 인터뷰에서 가장 흔한 코멘트 가운데 하나란 것을 뒤늦게 알았다. 과연 즐기는게 우승의 비결인가. 이게 사실이라면 골프처럼 즐기면서 거액을 버는 ‘환상의 직업’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맞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선수의 세밀한 표정까지 비추는 TV중계를 보면 우승조 선수들의 막판 샷 하나하나에 피가 마르는 모습이 역력하다. 즐기는 게 아니라 죽기살기의 플레이다.

마라톤으로 따지면 40㎞ 지점이 넘어서부터다. 지난번 바이런 넬슨클래식에서 우승한 배상문처럼 72번째 홀 그린에 가서야 승부가 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개의 대회에서는 선두그룹 3~6명쯤이 엉켜 막판까지 엎치락 뒤치락 승부를 벌인다. 이때의 승부는 스윙이 아니라 그동안의 플레이와는 전혀 다른 기량 즉, 누가 마음을 더 잘 다스리는가의 마인드컨트롤에서 결판난다.
이것이 개인 스포츠로써 골프와 일반 종목과의 차이다. 마라톤이나 심지어 유도 레슬링 등은 막판 스퍼트나 체력이 승부를 좌우하지만, 골프에서의 최후의 승부는 상대방 실수에서 결정된다. 나의 나이스플레이가 아니라 그냥 내 페이스대로 가고 있는데 상대방이 고맙게도 무너져 주는 게 골프대회 대부분의 막판 승부형태다.
배상문의 우승 경우 마지막 라운드 16번 홀에서 1m60㎝ 버디퍼트가 성공한 반면 키건 브래들리는 배상문과 거의 일직선상에, 그것도 70㎝나 가까운 90㎝짜리 퍼트가 실패했고, 다음 홀에서 그 후유증으로 보기를 한 데에서 얻은 것이다. 17번 홀(파3)에서 브래들리의 티 샷이 제대로 맞아 스트레이트로 그린을 훌쩍 넘어간 것은 똑같은 홀을 4일 연속 접한 프로에게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갑자기 스윙에 자신감을 잃어 한 클럽을 더 잡았다. 마인드컨트롤 수양이 덜 된 탓이다.
‘골프 게임을 즐긴다’는 말은 이래서 나온 것 같다. ‘편안한 게임’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다. 피말리는 승부에서 편안한 플레이를 할 수 있다는 능력이야말로 허구한 날 밤을 새워 스윙연습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골프 기량일 수가 있다.
2타차이면 한 홀에 버디와 보기 차이. 6월 초 현재 미국 PGA 평균타수 1위는 타이거 우즈(68.5)이지만 우즈와는 2타차 이내로 한방에 뒤집을 수 있는 선수만 브래들리 등 30여명에 이른다. 그러나 우즈가 막판 접전 때 우승 확률이 높은 이유는 우즈는 편안하지만 상대방이 무너져 주기 때문이다. 주목할 만한 현상은 선두그룹이었다가 우승을 놓친 선수들의 막판 5개 홀의 스코어가 그 이전의 평균 스코어보다 나쁘다는 점이다. 우즈의 스태프 중에는 심리치료 전문가도 있다. 필자는 아직 우리나라 선수 가운데 스윙코치와 심리치료 전문가를 동반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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