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상승 위해 ‘賢士 찾아 삼만리’
신분상승 위해 ‘賢士 찾아 삼만리’
  • 심상훈
  • 호수 34
  • 승인 2013.03.15 1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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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경영 | 세치 혀를 지혜롭게 쓴 소진蘇秦 ①

▲ 춘추전국시대에는 좋은 스승을 만나 현사가 되면 누구든 출세할 수 있었다.
소진蘇秦은 동주東周 낙양洛陽 사람이다. 그는 어느 날 봇짐을 싸서 집을 떠난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였다. 스승을 찾아 동쪽의 제나라로 가서 귀곡자鬼谷子의 문하생이 된다.

귀곡자는 누굴까. 정설에 따르면 종횡가縱橫家(중국 전국시대의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정치적 책략가로 당시 국제외교에 활약한 유세객遊說客들을 말함)의 비조鼻祖다.

당시 초나라 땅 청계淸溪에 있는 귀곡 지방에 은거하며 활동한 사상가 왕후王后를 말한다. 왕후는 기원전 3세기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범려와 계연이 왕후 밑에서 수학했다는 설이 있는데, 좀처럼 믿기 어렵다. 소진과 범려의 주요 활동 시기가 대략 100년가량 차이나서다.

귀곡자, 다시 말해 왕후는 띠집을 짓고 은거한 채 수도하면서 무리들을 귀곡의 심산으로 불러 모아 학문을 전수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매우 신비하게 여겨 귀곡자 선생이라고 불렀는데, 본명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귀곡자 왕후는 고금에 제일가는 기인으로 무사에 가까운 풍모에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젊은 시절엔 공자와 함께 노자에게도 수학한 적도 있었다. 그가 거처하는 동부洞府 안은 네벽이 전부 죽간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상성」, 중앙M&B


여기서 노자는 「도덕경」의 그 노자가 아니다. 그 노자는 공자 이후의 인물이라서다. 귀곡자를 공자와 동문으로 묘사한 것은 「상성」이 소설인 점을 감안해야 한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자. 동주 낙양 사람 소진은 왜 집을 떠나 귀곡자의 문하생이 됐을까. 춘추전국시대의 상황을 살펴보자.

춘추전국시대는 각 제후국이 부국강병을 도모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부국강병을 효과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사인의 역할과 위상이 점점 더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중략) 다양한 지역에서 제자들이 특정 스승을 찾아 모여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춘추전국시대가 탁월한 사인, 다시 말해 현사賢士를 목 놓아 고대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당시는 스승에게 통치와 관련된 지혜를 배워 현사가 된다면 누구든지 입신양명할 수 있었다. (중략) 왜 제자백가가 춘추전국시대에만 유독 번성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현사를 요구하던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사인을 효과적으로 길러낼 수 있는 국가적 장치가 각 제후국 내부에 준비돼 있지 않았다. 제자백가라는 일종의 사학私學집단이 번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학 집단이 발생하자마자 전통적인 귀족계급이 아닌 일반 평민도 훌륭한 스승을 찾아 신분상승을 도모했다.
- 「철학의 시대-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 사계절


소진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자 먼 길을 떠난 것이다. 귀곡자라는 훌륭한 스승이 있다는 정보를 수집하고 신분상승을 꾀한 것이다. 스승에게 통치와 관련된 지혜를 배워 현사가 된다면 누구든지 입신양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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